처음 준 선물은 신발이었다

혼란형 애착이 안정형이 되기까지

by 코알코알

신발은 보통 연인이 도망간다고 잘 주지 않은 선물이다. 보통 주더라도 도망가지 않을 확신이 있을 때 주는 선물이 신발이다. 나는 그 신발이라는 선물을 기념일이 아닌데도, 오래 만나지 않았는데도, 덜컥 사서 쥐여 주었다. 만난 지 41일의 일이었다. 그때는 아직 신뢰라든지 이런 것들이 확실하지 않은데 왜 그런 선물을 준 것일까? 만약 나에게서 도망을 갈 것이라면, 영영 돌아오지 말라는 뜻으로 준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읽고 머리가 띵해졌을 것이다. 읽기를 그만두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 대해 변호를 해보자면 나는 그때 혼란형 애착이었다. 혼란형 애착이라는 것은 불안형과 회피형 애착이 둘 다 있는 것을 의미한다.


도망칠 사람이라면 영영 오질 않기를, 그런데도 아프지 않게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내가 자기 방어가 심한지 엿볼 수 있다. 나는 먼저 이별 통보를 하는 쪽이 나에게 더 타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별을 통보할 자신은 없고 은유적인 선물을 주었다. 심지어 상대방은 그걸 받고 엄청나게 기뻐했다.


신발에는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좋은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신발은 결국은 이런 의미도 있었다. 나와 함께하든 함께하지 않든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 실제로 내가 줄 수 있는 제일 좋은 것을 주었다.


나는 주급으로 15만 원을 받는데 마지막 주급으로 준 신발이다. 그 당시 나는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데이트비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다른 편의점도 기웃거렸다. 그 결과 나는 편의점에서 잘리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다는 의미에서 나는 나이키 신발 중에서 가장 클래식하고 유행 타지 않을 비싸고 좋은 신발을 사주었다. 그 신발을 주면 나는 라면도 먹지 못하고 며칠 동안은 굶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예감했다.


어쩌면 신발을 주는 선택은 절묘한 선택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머물게 하고 싶은 마음과 놓아주는 마음이 공존하는 상태였으므로 나에게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 사람의 발을 보호할 수 있는 신발을 주었다. 만약 이 사랑이 끝나더라도 비난하지 말자. 말없이 축복해 주자. 가도 되고 떠나도 된다. 하지만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랐다.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랐다. 그걸 원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주었다. 그 신발을 건네줄 때 무언가를 벌써 잃은 듯한 슬픔과 허무를 건너야만 했다. 실제로도 손을 벌벌 떠는 것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연습했는지 모르겠다.


내 곁에 남든 떠나든 어디서든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떠나더라도 발이 아프지 않기를 길에서 넘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조금은 기억되기를 바란 것 같다. 신발은 가잘 실용적이고 소모되는 물건이다. 매일 쓰며 나를 생각하겠지 생각이 들었다. 신발은 낡으면 버려진다. 언젠가는 닳고 버려진다. 사랑은 언젠가 쓰면 바닥날까? 사랑의 유한함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든 나에 대해 떠올리면, 그 신발이 그때로 데려가 줄 것을 알고 있다. 신발은 가장 아래에 있지만 사람을 가장 먼 곳으로 데려다주는 존재이다. 신발 덕에 계속 걸을 수 있고, 넘어지지 않고, 차가운 바닥을 딛고 설 힘을 주는 물건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되고 싶은 물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신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침대가 되고 싶고, 옷이 되고 싶고, 가방이 되고 싶어 하지만 나는 신발이다. 눈에 띄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 그 사람의 가장 바닥에서 함께 걷는 존재.


나는 사랑받을 가치 있는 놈일까?


이것은 빈첸과 하온의 바코드라는 노래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이다. 나는 타인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면서도 사랑받을 가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조현병이라는 진단은 내가 정상인지 사랑받을 가지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자존감의 문제와도 직결되었다. 왕따와 아동 성폭행은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갖지 않고, 사랑을 느껴야 할 때 주춤하게 한다. 기대고 어리광을 피우고 싶을 때 한번 주춤하게 한다.


신발을 사주었다. 사실은 그 사람을 위해 길을 사주었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나는 너를 위해 새 길을 주었으니, 내가 아닌 너의 길을 걸으라는 말이었다. 선물을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네가 어디를 가든, 네 발에는 나의 흔적이 남아있기를 바랐다. 사실은 기억되기를 원했다. 창피한 말이지만 나는 그가 머무르기를 원했다. 마음속 깊이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떠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 되지? 신발을 사서 주는 행위로 결국은 관계를 연장하고 싶었다.


그 사람이 신발을 신고 남지 않는다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소비되고 버려진 존재로 남는 것이었다. 그것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깃들어 있는 선물이었다.


글을 쓰다 보니 봉숭아와 비슷한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봉숭아의 꽃말은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이다. 하지만 건드려야 씨를 퍼트릴 수 있는 역설이 보이는 아이러니함이 있다. 떠나더라도 나를 가볍게 지나치지 말아 줘. 신발을 신고 걸어가다 떠올려 줘. 기억에서 쉽게 잊히고 싶지 않았던 내면을 신발에서 보았다. 편의점에서의 마지막 주급을 그대로 준 이타성이라는 포장을 하였지만 지독한 이기심이 동기인 외로운 사람의 자기애적 외침이 고달프다.


신발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도구지만 그것을 주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머무르길 바라는 마음의 비틀린 표현이다. 그 사람의 발에 꼭 맞는 따뜻한 신발을 주며 너를 위한 자리는 여기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말은 너무 적나라해서 대신 신발을 줬다.


어차피 떠날 거면 내가 먼저 주는 것이 낫지. 그러면 덜 억울하고 덜 슬프다. 네가 떠나는 그 순간을 미리 상정하고 마치 이별을 미리 준비하듯 신발을 내준 것이다. 자기 파괴적인 애착이 나를 보호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상실을 선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해적 방어기제를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떠날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신발을 신고 나서 40일 남짓했던 사람이 현재 480일씩이나 머무르고 있다. 쓰고 닳아지고 버려질 것이라고 믿은 신발이 오래 남겨지고 현재도 애지중지하며 쓰이고 있다. 신발은 터진 곳이 없다. 이번만큼은 결핍이 떠나게 한 것이 아니고 함께 머물게 한 이유라고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사랑이란 결국 떠날까 안달복달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도 괜찮다고 믿으며 내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신발을 주지 않는다. 주더라도 망설이거나 손을 떨지 않는다. 이 사람은 비둘기처럼 나의 곁에 다시 온다는 믿음이 생겼다. 아무리 멀리 가도 다시 올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를 믿는 법을 이 사람과 함께 배워간다. 현재 나는 혼란형 애착이 아닌 안정형 애착이다. 회피하고 싶은 마음과 불안했던 마음과 직면하고 나서야 안정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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