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조금의 뇌과학도 같이
조현병을 고백하기 전 나를 보고 성격도 외모도 좋다고 했던 사람과 데이트를 했었던 경험이 있다. 나는 얼마 못 가 고백을 받고 병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다. 고백을 한 그 당사자는 굉장히 당황하며 방금의 고백은 잊어달라고 하며 황급히 집에 데려다주었다. 집에 가는 동안 어색한 정적만 흘렀다. 그렇게 다시는 만나지 않았지만, 1년 뒤 연락이 왔었다. 다시 만나자는 말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통쾌하긴 했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는데 너는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깔끔하게 잊었다.
내가 마음에 든다는 어떤 남자는 나와 데이트를 하던 도중에 가방 속 약병을 보았다. 그 뒤에 나를 멘헤라라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뒷담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너무 당황해서 우울증약이라고 거짓말도 했었다. 조현병은 고백을 듣고 나서 말할 생각이었는데, 단숨에 연락이 끊기고 멘헤라라는 공격만 남았다. 처음에 멘헤라라는 말을 몰라서 사전으로 찾아봤는데 이런 뜻이 있다. 멘헤라라는 말은 일본에서 건너온 신조어로 멘탈헬스 갤러리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단순히 우울증이나 조울증 조현병 환자를 말하는게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주는 부정적인 뜻을 지닌 단어이다. 그는 예전에 히키코모리였다고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 희미하게나마 있었다. 하지만 병을 앓아본 사람이기 때문에 더 무섭게 치밀하게 낙인을 찍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병보다 무서운 것은 병을 둘러싼 낙인이다.
멘헤라라는 소문이 퍼지고 나서 나는 잘 활동했었던 동아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만두게 되었는지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 그 일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현재 그 사람은 잘 활동하고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한순간에 술자리의 안주가 되었다. 나를 옹호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내 편이 이렇게 없어 절망했다. 증거를 잡으려 연락했던 동아리부원들은 다 나를 차단하거나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나는 그러면서 더 필요해졌다. 나를 평범하게 봐주는 관계가 어디 있을지 포기하면서도 더 갈망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평범하게 봐주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정신병을 앓아본적도 없는 남자친구는 나를 지지했다. 정신적으로 자기가 힘들어서 정신과에 다니고 히키코모리 센터를 다니던 사람은 오히려 나를 무시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나에게 특별히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아도 그저 곁에 머물러주는 태도만으로 인간으로서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꺠달았다. 나는 상처가 있다고 해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너는 환자가 아닌 사람이라는 시선을 주는 것은 병의 유무가 아님을 배웠다.
사회적 지지를 받으면 조현병 환자에게도 좋은가? 정답은 그렇다 이다. 지지를 받으면 조현병 환자의 무너진 도파민 균형이 바로잡히고, 편도체가 억제되어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전전두엽의 강화로 무너진 사고나 인지가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 조현병의 큰 원인 중 하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데 그 호르몬을 억제하며 재발의 위험도 줄여준다. 사회적인 인지 회로를 자극해서 적응력이 상승하기도 한다. 지지를 받으면 내 불안한 뇌와 호르몬은 차분해진다. 나는 치료실에서 약물치료로 한번,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두 번 회복된다. 약이 균형을 맞춰준다면 지지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힘을 되찾게 했다.
우리는 흔히 치료를 약과 병원에서만 찾으려 한다. 하지만 조현병 환자에게 가장 절실한 치료는 병명보다 먼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따스한 시선이다. 그 시선은 불안으로 과열된 편도체를 진정시키고, 옥시토신을 분비해 관계 속에서 안정을 찾게 한다. 약이 뇌의 균형을 회복시켜 준다면, 지지는 마음의 균형을 되돌려준다. 평범하게 불리는 그 순간, 나는 환자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사람으로 숨 쉬게 된다. 사회적 낙인이 나를 투명하게 만든다면, 지지는 나를 다시 보이게 만든다. 결국 인간을 회복시키는 것은 약의 분자 구조가 아니라, 곁에 머물러주는 누군가의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