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육아휴직이 뭔지 몰랐다.
아니, 감히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출산휴가 3개월이 끝나자마자 둘째 아이를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에 맡겼다.
매일 아침, 아이의 얼굴을 닦고 가방을 메웠다.
하지만 발걸음은 늘 무거웠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이 엉덩이에 붉은 발진이 생겼다.
기저귀 발진이라고 했다.
어린이집 원장은 말했다.
“잘 돌보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걱정을 접을 수 없었다.
곧이어 고열과 요로감염.
결국 시어머니가 시골로 아이를 데려갔다.
아이를 보내고 며칠 뒤, 단지 내 커뮤니티에 떠돈 소문 하나.
“그 어린이집에서··· 영아가 사망했대요.”
나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아이가 우리 아이였을 수도 있었다.
그 일 이후, 나는 그저 죽어라 일만 했다.
초과근무는 일상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했으니까.
빚은 줄지 않았고, 미래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퇴근하면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고, 나는 조용히 그 옆에 누웠다.
이불 위로 흐르는 땀 냄새와 피곤한 살결.
‘내가 다 견디면, 이 아이들은 덜 힘들겠지.’
그렇게 10년을 하루처럼 살았다.
나는 커리어우먼도, 전업맘도 아니었다.
두 세계에서 동시에 불타는 ‘투잡의 삶’을 사는 엄마였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누구도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냈다.
이제 나는 그 시절의 나에게 묻는다.
‘고맙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 지독했던 10년.
저녁을 대충 때우고, 야근을 자처하고, 쉬지 않고 일한 시간들.
내 몸이 두 개, 아니 세 개였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란 적도 있다.
나는 호봉이 오를 때마다 공제회에 매달 100만 원씩 꼬박꼬박 불입했다.
그렇게 8천만 원이 쌓였다.
복리의 마법은 조용하지만, 확실했다.
다른 예금 2천만 원을 더하니, 마침내 ‘1억’이라는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내가 견뎌낸 날들의 무게였고,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조용한 힘이었다.
나는 부동산 책을 밤마다 읽었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잠들었다.
언젠가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물려줄 ‘아이들의 집’ 필요했다.
무모했다. 그러나 도전하지 않으면 늘 똑같은 제자리였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자. 가난은 더 이상 대물림하지 않겠어.’
그 다짐이 마음속에 깊게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