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에 관한 논의

나는 이 단어가 몹시 어색했다.

by 김종환

자애란 무엇인가: 내 안의 가장 엄격하고 다정한 스승


명상과 자기 성찰의 여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애(自愛)’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된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라는 조언은 모든 수행의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보자. 이 말처럼 어색하고,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 또 있을까?


이 글은, 그 ‘자애’라는 단어 앞에서 나와 같이 어색함과 저항감을 느꼈던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발견한, 따뜻하지만 때로는 날카롭고, 관대하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은, ‘나만의 자애’에 대한 이야기다.



‘자애’가 와닿지 않는 이들에게: 어색함의 정체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자신을 안아주세요.”


이런 조언을 들을 때마다 나는 깊은 어색함에 빠졌다. 스스로를 간지럽히면 전혀 간지럽지 않은 것처럼, 내가 나에게 의도적으로 다정한 말을 건네는 행위는 어딘가 작위적이고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마음 한편의 냉소적인 관찰자가 “이건 가짜야, 일부러 하는 거잖아” 하고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평생 타인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법은 배워왔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법은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재판관이자, 가장 혹독한 비평가로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그렇기에 자애를 처음 시작할 때 느끼는 이 어색함과 저항감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마음의 근육을 처음 움직일 때 느끼는 당연한 뻐근함과 같다.


문제는 우리가 ‘자애’를 감상적이고 무조건적인 긍정으로 오해한다는 점에 있다. 현실의 나는 고통스러운데, 억지로 “나는 행복하다”고 외치는 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짓 자기암시’일 뿐이다. 진정한 자애는 그런 값싼 위로가 아니다.



자애에 대한 새로운 묘사: 비만 친구를 둔 나


자애를 흔히 ‘상처 입은 아이를 돌보는 따뜻한 어머니’에 비유하곤 한다. 아이를 안아주고, “괜찮다”고 속삭여주는 무조건적인 사랑. 이 비유는 훌륭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와닿지 않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 내가 발견한 또 다른, 훨씬 더 현실적이고 처절한 비유가 있다.


자애란, ‘비만인 친구를 산 정상으로 억지로 끌고 가는 친구의 심정’과 같다.


여기 한 친구가 있다. 그는 내가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나의 분신이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몸에 좋지 않은 음식과 게으른 습관에 빠져, 심각한 비만과 무기력으로 고통받고 있다. 나는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나는 그에게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멋진 풍경을, 그리고 건강한 몸이 선사하는 자유를 선물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를 데리고 산으로 간다. 당연히 그는 저항한다. 숨이 차다고, 다리가 아프다고, 그냥 이대로 주저앉고 싶다고 불평한다. 이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괜찮아, 넌 할 수 있어”라는 다정한 말만 반복해서는 결코 그를 정상으로 데려갈 수 없다.


때로는 그의 멱살을 잡고서라도 “더 좋은 풍경을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거칠고 절박하게 그를 이끌어야 한다. 때로는 단호하게 그의 변명을 잘라내고, 때로는 날카롭게 그의 나약함을 질책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과정은 겉보기에는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행위의 뿌리에는, 친구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가장 깊고 진실된 ‘사랑’이 깔려있다.


나의 자애가 바로 이와 같다. 그것은 내 안의 충동적이고 나약한 나(비만 친구)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산 정상)으로 데려가기 위한, 가장 치열하고도 다정한 노력이다.



자애의 속성: 나를 이끄는 순수한 목적의식


이 ‘친구를 끌고 가는 나’의 마음, 즉 나의 자애는 몇 가지 중요한 속성을 가진다.


첫째, 자애는 단 하나의 순수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진정 옳다고 생각하는 유익하고도 바람직한, 의미와 보람을 느끼고 지속가능한 행복이 있는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 것’이다. 이것은 단기적인 쾌락이나 순간적인 편안함과 타협하지 않는다. 오직 나의 장기적인 성장과 안녕만을 목표로 한다.


둘째, 자애는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도파민 시스템이 요구하는 ‘짜릿한 쾌락’도, 편도체가 외치는 ‘안전에 대한 갈망’도 아니다. 그것은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선택의 기로마다 은은하고 흐릿하게 속삭이던 바로 그 목소리의 정체다.


셋째, 자애는 달빛의 이정표와 같다. 세상에는 나를 유혹하는 수많은 거짓 불빛들(유튜브, SNS, 자극적인 음식)이 있다. 과거의 나는 그 불빛들을 향해 날아들다 날개가 타버리는 밤의 곤충과 같았다. 하지만 자애는, 그 모든 거짓 불빛 너머에 있는, 변치 않는 진짜 빛인 ‘달’을 가리킨다. 그 빛은 나를 흥분시키지는 않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을 고요하고 명료하게 비춘다.



자애 강화의 기대효과: 삶의 동력이 되다


이런 자애심이 내 안에서 강해질 때, 나의 삶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자애는 특정 상황에서만 발동되는 수동적인 ‘장치’가 아니라, 내 삶 전체를 이끌어가는 능동적인 ‘동력’이 된다.


내가 나를 진정으로 측은히 여기고 사랑한다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악순환에 빠지고 실수할 만한 선택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주변 환경을 계속 정리할 것이다. 나를 유혹하는 과도한 자극으로부터 나를 멀리하고, 내면의 성장에 유익한 자극들로 내 주변을 채울 것이다.


나는 나의 몸과 마음을 계속 가꿀 것이다. 나의 존재가 병들거나 악취가 풍기지 않도록, 꾸준히 운동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며, 나의 내면을 돌볼 것이다.


이 모든 행동은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나 강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나 자신)를 귀하게 여기고, 그가 최고의 환경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된다.


결국 나의 모든 실수와 방황은, 결국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가장 처절하고도 위대한 사랑의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나를 진정 사랑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어찌 왔겠는가. 나는 나를 살리고 싶었다.”


진정한 자애는, 그 간절했던 마음을 이제는 더 지혜롭고, 더 단단하며, 더 꾸준한 방식으로 실천해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내 안의 가장 엄격하고도, 가장 다정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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