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주의로 포장된 허무함
소설 속 세연은 기대할 것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저항운동이 자살이라고 믿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녀에게 설득당한 주변인들도 차례로 자살을 하며, 그들이 자살 선언문을 올린 자살사이트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다. 세연은 비겁하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과거의 세대와 달리, 현재의 세대는 더 이상 이룰 것도 없고, 나아갈 것도 없는 상황이라지만 자살선언을 혁명이라 칭하다니.
나는 세연과 삶을 바라보는 입장이 허무주의적 측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한 웹툰작가에게 ‘태어났으니까 사는 남자’라는 수식어가 있다.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는 그를 희화화하는 말이지만 그 말에 나는 강렬히 동의한다. 태어난 건 내 의지가 아니었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내 의지가 아니나,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으니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죽음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세연은 현 대한민국 청년을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라고 단정 짓지만, 아직도 기술적․경제적인 발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촛불시위나 플로이드 시위처럼 인권향상을 위해 시민들이 노력하고 있다. 세연의 기준에서는 이런 발전이 미미해보여서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세연은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조직의 말단에서 경쟁을 해야‘하는 사회구조를 한심하다고 보지만, 이런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를 위대한 일로 봐야 되지 않을까.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는 이유로 자살선언을 영웅주의로 포장하는 것은 본인이 바라보는 세상이 정답인 것으로 생각하는 오만과 편견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내 생각에도 반론이 있을 수 있고, 논리적으로 세연의 생각을 완벽히 반박할 수 없을지언정(소설 속 ‘나’나 휘영이 그랬던 것처럼) 세연이 허무주의를 영웅주의로 착각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세연을 따라 자살하는 인물들을 포함한 소설 속 인물들이 하나같이 호감인 사람이 없다. 그래서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면들이 조금씩 보인다. 나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특성을 모아놓은 것일까 하는 쓸쓸함이 생긴다. 소설 속 ‘나’는 세연이 본인에게는 자살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 혼자서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본인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세연과 그다지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나, 본인을 겁쟁이로 생각해서 빠뜨린 것 아니냐에 대한 배신감을 느껴서이다. 거기서 정말 공감을 했던 게 친구에게 느끼는 이런 감정들은 평소에 느낀 적이 많다. 그 친구는 별게 아니라서, 나에게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말을 안했을 수도 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그 친구가 승진을 했다든지 결혼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서운해 했다. 그 친구는 내 생각만큼 나를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나의 소심함과 치졸함이 모여 친구에게는 티도 못 내고 나 혼자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끙끙 앓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또한 가족들 사이에서 느끼는 미운오리새끼와 같은 콤플렉스라던지, 그런 식으로 소설 속 인물 면면이 가지고 있는 우울함이나 어두움이 나와 동일시되는 부분들에서는 공감도 가고, 이들이 20대의 창창한 나이에 세연의 말에 흔들려서 어떤 마음으로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지 이해는 간다.
현실이라 가정했을 때, 세연의 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연을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게 된다면 실제로 역사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힘들다. 90년대 초반 분신정국이라 불릴 만큼 분신자살이 주된 반정부 시위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김지하 시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분신자살에 대해 극단적이라고 우려 섞인 질타를 했지만 결국 한국의 현대사를 공부하는데 그들의 이름이 나오는 건 사실이다. 세연이도 이런 것을 원하는 게 아닐까. 평가는 둘째 치고, 본인의 이름이 역사에 남기를, 자신의 자살이 누군가에게 기억되기를 원한 것 같다. 현실 속에 세연 같은 선동자가 있다면, 사람들이 자살이 혁명이 아닌 회피로 느껴서 끝내 그 선동이 성공으로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