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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샘 Apr 18. 2023

오봉제 칼국수 집

궁금한 가족, 사랑이 필요한 유아

   

  오봉제 저수지를 지나 순성으로 출근하던 10여 년 전으로 기억한다.

  개학을 앞두고 준비 차 출근하는 날, 비워 둔 교실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어 머리를 말리는 손이 바쁘기만 했다. 신평에서 순성 쪽으로 접어들면, 삽교천 공사로 인하여 농업용수가 넉넉해지기 전에 넓은 들에 물을 보급하던 오봉제 저수지가 있다. 농업용수 보급의 역할을 다하고는 연이 가득하고 낚시꾼들로 낚시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만발했던 연꽃이 스러지고 추수가 한창일 때는 겨울을 준비하려는 철새 고니들의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1년 전 철새들과 함께 날아 들어와 하우스 둥지를 틀고 칼국수 집을 시작한 부부와 그 집 아이들의 안부가 궁금한 것이다.

  저수지 앞산 쪽의 공터에 하우스가 생기더니 몇몇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간판도 표시도 없이 낚시꾼들에게 칼국수와 파전을 판다고 했다. 맛있는 입소문을 따라 낚싯대를 잡지 보지도 못한 우리도 칼국수를 먹으러 갔다. 흙바닥을 대충 고르고 깐 부직포 위에 놓은 식탁은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해 조금씩 뒤뚱거렸고, 여섯 테이블 꽉 찬 손님들의 시중에 부부가 허둥대고 있었다.

  가끔 들러 인사 나누는 사이가 되자 부부는 여섯 살 아들을 내년에 유치원에 보내고 싶다며 이것저것을 물어왔다. 하우스 식당 뒤편에 작은 하우스가 이들 부부와 아들 그리고 더 어린 딸아이까지 네 가족이 사는 둥지였다. 연꽃이 만발한 여름에 며칠 장사 흔적이 없어 궁금했는데 학교의 소식통 김 선생이 하우스 식당이 무허가여서 근처 식당 사람들의 신고로 영업정지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집의 경제 소식을 들은 바는 없지만 넉넉하지 않을 것을 짐작하니 아이들의 소식이 퍽 궁금했는데 퇴근길 빵집 앞에서 누군가 반갑게 손을 잡았다. 놀라 쳐다보니 하우스 식당의 부인이었다.

  “영업 못 하게 돼서 애들 아빠는 요 위 상가 공사장에 나가고 내는 여기서 상자 주워 팔아요. 목구멍이 포도청 아녀유”

“두부는 이 다 나와 계시면 애들은 어떻게 하고요?”

“어쩔 수 있나요? 둘이 다 저기 어린이집 종일반에 맡겨요. 아시다시피 집이라고 바람만 피하지 제대로 집 구실이나 할 수 있나요?”

  주스를 나누어 마시고, 애들의 안부도 묻고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내려 하자 아무 걱정 없다고 웃으며 돌아서던 여자의 등이 참 씩씩해 보였다. 배우고 싶은 씩씩함이었다.

  다시 저수지로 고니가 날아들고 연꽃 진자리 하늘 향해 소리치는 듯한 연밥까지 스러질 때쯤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는 소식에 반갑게 들려 파전에 막걸리를 기울이고 아이들에게 그림책 몇 권 전하고 겨울잠을 자듯 방학을 맞았다. 방학 중 부족한 운전 실력으로 버스를 타고 출근할 때도 평상시처럼 사람이 오가는 것 같았는데 어찌 된 일일까?

  만나면 바로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는 이 시절에 왜 그 흔한 전화번호도 나누지 않았을까? 

  “사정상 대천으로 이사합니다.”

  혈서처럼 흘러내린 붉은 래커 글씨가 무심한 이웃을 탓하는 원망일까? 혹시라도 안부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인사였을까? 오봉제에 서서 한참을 색을 잃은 연대와 요동 없는 물을 보며 서 있었다. 고단한 삶을 모두 나누지는 못했어도 아이들에게 따뜻한 이웃이 있다는 위안은 되고 싶었는데.

 그래 대천은 여기보다 따뜻하겠지? 내게 철새처럼 왔다가 인사까지 남기고 간 가족들은 네 식구 함께 할 튼튼한 둥지 한 칸이라도 장만해 따뜻한 곳으로 날아갔기를 기도하였다.

 오봉제 저수지에 서서 그곳으로 가는 바람에 무심한 이웃의 안부를 실려 보내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중에도 자녀를 키우며 살아가는 것은, 힘든 지금을 견디어 내며, 다가올 더 따뜻할 봄을 기다림. 그 패턴의 반복이 아닐까? 철새들이 봄을 찾아 떠나듯 오봉제를 떠난 하우스 가족을 그리워하며 이곳에서 오래 정착한 다른 철새 나를 보았다. 나의 삶은 유년을 지나 학령기를 마치고 직업까지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결혼과 잘 자란 세 아이까지.

 그러나 이 삶 속에서도 나에게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남편은 역마살 누르며 현재를 잘 살아간다고 칭찬인 가끔은 놀린다.

 여고 시절에 시작한 글쓰기는 국어국문과에 떨어져, 유아교육과에 진학하며 나에게 생긴 가지 않은 길 한쪽이 되었다. 결혼과 육아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시를 쓰고자 하였다. 세상에 나의 시를 보태지 않아도 감동적인 시가 많다는 것은 퍽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도종환 선생님의 비롯한 시인들의 우아한 독자로만 살아도 좋았을걸. 되지도 않는 시 쓰기에 힘든 시간이 많았다. 늘 시에 대한 열망으로 심란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내 시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많은 시를 쓰지 못하였지만 시라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내가 철새로 사는 이유이다. 


         

늦은 여름 아침

손이라도 잡고자

더듬더듬 쥔 마른 손목 위에 

연밥 한 그릇

한마디 꼭 하고픈

하늘로 향한 밥에 촘촘히 박힌 씨들

밥은 씨를 잉태한 자궁인가?     

한 철 빛나는 향기 후에

마른 몸으로 오백 년을 살고 

꽃이 되는 씨를 품은 밥

밥과 씨 조각을 주섬주섬 챙기며

씨에게 물었다.

오백 년 뒤 아니 오십 년 뒤라도  

살아 있는 시를 품을 수 있겠느냐고     

  <연밥 시밥>의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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