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의 거리, 상점, 그리고 우리의 미래
클래스 올덴버그
근래에 인터넷에서는 쇼핑라이브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 소비상품을 판매하고 직거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와 중에도 도시풍경은 재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주변을 둘러본다면 쉽게 공사하는 곳을 발견할 것이고, 새로운 건물들이 노후한 건축물 사이에 속속들이 등장한다. 도시재생뉴딜사업이 공공연히 논의되면서. 쇠퇴한 구도심, 노후주거 밀집지역에 생활환경을 높여주기 위한 노력이 주목되고 있다. 하지만 기존 생태계를 재활성화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도시의 지속적인 변화와 재개발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있다. 바로. 도시에 나오는 그 많은 쓰레기는 어떻게 처리해야하고, 어디로 가야하는가?
우리는 더러워진 거리 주변을 흔히 볼 수 있다. 무방비하게 쌓여진 쓰레기, 그리고 흔적들. 배달과 포장이 많은 이 시기에 불어나는 일회용품 쓰레기의 양과 함께 나오는 산업폐기물 등의 각종 쓰레기 배출이 원활하지 않다. 특히, 도시의 거리에 점점 더 쌓여가는 쓰레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문제는 1960년대 이후 뉴욕의 도시재개발에서부터 시작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시재개발관련사업은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면서 슬럼가 주택재개발, 환경오염과 다운타운의 공동화 쇠퇴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이 사이에서 도시재개발에 따른 환경변화에 주목한 예술가들이 뉴욕에서 삼삼오오 모여 함께 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 1929~)이다. 사실. 올덴버그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은 익숙한 예술가일지 모른다. 청계1가 청계광장에 위치한 <스프링 Spring>(2006)이 올덴버그의 공공조형물이다. 인도양의 다슬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스프링>(2006)은 비난과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 크게 이슈화 되었다.
올덴버그의 공공조형물은 보통 기념비적인 조각이자 초대형 프로젝트로 진행되게 되면서, 그의 작품은 언제나 우리의 시선을 끈다. 지금은 <스프링>(2006)도 그의 대형조각 중 하나가 되었지만. 올덴버그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가 표현하고자 한 조각의 의미가 무엇인가? 올덴버그는 도시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한 사람이다. 특히, 도시공간을 자연과 조화시킨 건축과 조각의 만남이라는 타이틀로 올덴버그의 조각은 공공조형물이기 전에. 주변의 일상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소비자본주의사회의 단면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를 주목하기도 하였다. 또한 올덴버그의 <립스틱 Lipstick >(1969), <구운 감자 Baked Potato>(1966), <스푼과 체리 Spoonbridge and Cherry>(1985~1988), <자이언트 햄버거 Giant Hamburger>(1962)등은 소비상품을 주제로 한 대형조각으로 그를 알렸다.
올덴버그는 립스틱, 구운감자, 스푼과 체리, 햄버거 등으로 실제 크기와는 대조적으로 누구도 살 수 없는 대형오브제로 구상했다. 그리고 이를 도시공간 안에 설치함으로써 새로운 자연환경을 제공하였다. 특유의 유머코드가 소비상품에 녹아들면서 올덴버그의 아이디어는 워홀만큼 당황스럽고 놀라움의 반전을 일으키는 대형조각이다.
자세히 대형조각들을 보면. 올덴버그의 조각은 대량생산된 소비상품을 대변하면서도, 복제재생산시킨 대형조각이다. 특히. 이 대형조각들은 우리가 현재 소비하는 상품들이라는 인식을 전해주면서도 이를 소비하고 있는 존재의 일부에 불과한 소비자임을 알린다. 워홀의 캠벨스프처럼 대량으로 생산되는 소비시스템 구조는 올덴버그에게도 실제 삶이었다. 대량생산과 소비는 낭비문화를 일으켰고, 무분별한 소비가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올덴버그는 소비자본주의사회의 문제 중 하나의 요인으로 생각했다. 특히 대형조각 중에서도 <구운 감자>(1966)와 <자이언트 햄버거>(1962)는 실제 먹을 수 없는 크기이지만. 라텍스와 고무, 판지상자로 채워진 캔버스 등을 재료로 질감을 살린 부드러운 조각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소프트 조각이라고 부른다.
올덴버그의 소프트 조각을 대표한 <구운 감자>(1966)와 <자이언트 햄버거>(1962)는 실제 그가 1961년 마샤잭슨 갤러리(Martha Jackson Gallery)에서 열린 전시를 참가할 때, 인근상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보고 고안한 작품이다. 우리가 먹고 소비하는 감자, 햄버거의 폭신한 촉감을 살린 거대한 조각들이 전시공간 안으로 들어온다면? 1963년 올덴버그는 그린갤러리(Green Gallery)에 실제 이 상황을 만들어냈다. 아이스크림, 케익, 의자에 걸쳐 있는 담요, 옷가지, 신문, 우산, 테이블보에 위치한 각종 식료품들을 전시공간에 배치한다. 그리고 작품이 걸려져 있어야 하는 벽과 조각받침대는 올덴버그가 제작한 소비상품들 혹은 실제 그가 수집한 잡동사니들이 그대로 함께 놓았다. 분명한 것은. 이곳은 앤디 워홀의 슈퍼마켓과 다르다는 것이다. “사세요 우리 모두 똑같은 것을 사요”를 외친 워홀. 이에 반해서 올덴버그는 “먹지마세요, 이건 가짜에요.” 라는 외치는 그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진지하게 무언가를 소비하기에도. 딱히 사고자하는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전시공간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촉감이 느껴지는 조각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과연 예술이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이런 전시공간의 환경을 구상한 올덴버그의 머릿속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올덴버그는 무엇이든지 직접 들고 나르는 것에 매우 익숙한 예술가이다. 올덴버그는 거리를 거닐면서 주변의 환경에 관심이 많았다. 올덴버그가 소비하는 것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다면. 버려진 것들을 전시공간으로 들고 들어오는 행동으로부터 그의 능동적인 자세가 엿 보인다.
소비상품에 대해 민감하고. 소비자본주의사회의 급격한 발전을 함께 경험하고 지켜봐온 올덴버그의 주변 환경은 도시재개발로 인해서 발생된 쓰레기 증가였다. 생각보다. 자유롭게 소비를 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 도시분위기는 매연과 환경오염이 가득한 장소였다. 길을 거닐면 언제나 매일 볼 수 있는 것은 소비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상점과 각종 쓰레기와 오물들이었다. 재건축과 재개발로 인해서 그 주변에 낭비되고 소모된 것들. 버려지는 것들이. 길가에 그대로 방치된 것을 지켜본 올덴버그는 전시공간에 이들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가게 The Store>(1961), <거리 The Street>(1960)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린갤러리에서 본 소프트조각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소비하고 싶은 충동은 커녕, 이게 뭘까? 하는 고민이 들을 정도이다. 올덴버그는 <가게>(1961)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빵, 천, 신문 등의 각종 쓰레기를 가득 쌓아두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붓으로 물감과 회반죽을 발랐다. 올덴버그는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가 부패되고 산화되는 것을 막고, 조각의 형태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했다. 보존할 수 없는 쓰레기의 성질을 올덴버그는 이를 영구화시켰다. <거리>(1960)에서도 역시나 제목그대로 거리에서 주운 판지, 포장용 자루 등의 각종 쓰레기를 가지고 이를 불에 그을린다. 그을린 형태는 인간의 신체와 흡사한 유기체적 형태이다. 전시공간에서 <가게>(1961)와 <거리>(1960)는 도시의 쓰레기장이 되었다.
전시공간은 변했다. 슈퍼마켓의 매혹적인 장소가 아닌. 악취가 나는 듯 한 냄새가 나는 공간. 당장이라도 장 팅겔리의 기계조각이 도착할 것 같은. 이 올덴버그의 전시공간속에서 우리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작품들을 만난다. 하지만 올덴버그의 대형조각, 그을린 재료들에 관심을 두기에. 우리가 방금 이 전시공간을 방문하기 전에. 마주한 쓰레기가 생각날 수 있다. 공간만 바뀌었을 뿐이지.
전시공간은 단순히 예술작품을 걸고, 받침대에 설치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일종에 도시의 환경을 한 공간에 압축시킬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당시, 올덴버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단지. 올덴버그의 조각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실제 전시공간 밖으로까지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는 이를 예술이라고 부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