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과 차 한잔 하던 중에 지인이 뜬금없이 여행 유튜브를 찍어보자는 얘기를 한다. 나는 뭐든 기록을 남기는 것을 참 좋아하다 보니 지인의 그 한마디가 너무 신나고 솔깃했다. 하지만 나는 지인의 얘기에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편집 이런 건 어떡하고... 나 못하는데..."
그 와중에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다.
"엇??? 나 그래도 해보긴 했....."
편집할 줄 모른다고 대답하던 중에 문득 내가 2009년도에 남자 친구이자 현재 남편에게 했던 프러포즈 할 때 만든 영상이 뜬금없이 생각났다. 급히 구글 포토에 남아 있는 프러포즈 영상 뒤적뒤적 찾아서 지인과 같이 보았다. 우리는 여행 유튜브 얘기를 하다 말고 10년도 훨씬 넘은 영상을 쳐다보며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난 사실 그 당시 영상편집이란 걸 배운 적도 없고,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 프러포즈 영상을 만들 당시에는 남자 친구가 보고 웃을 수 있도록 어설프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름대로 우리의 몇 년 동안 추억이 담긴 사진도 담아보고, 나의 오랜 친구들의 축하 영상, 모임 때 남자 친구 몰래 살짝 부탁해둔 남편 친구들 영상, 나와 하루의 긴 시간을 함께하는 사무실 동료들의 영상을 편집해서 넣었다. '영원히 사랑해'라는 문구도 군데군데 넣어서 만든, 지금 보니 손발이 한껏 오그라드는 영상이다. 사실되지도 않는 영상편집력으로 인해 너무 어설프고 시간도 꽤나 걸렸다.
예쁘게 꾸며진 둘만의 공간에서 빔프로젝터로 내가 만든 영상을 보고 남자 친구를 감동의 도가니에 넣는 프러포즈 시나리오
<이것은 이미 나 혼자 상상하고 나 혼자 즐거워하는 프러포즈 시나리오>
[지금 다시 보니 멘트가 정말...]
프러포즈 장소는 과거의 내 일터_면사무소
지금은 그곳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 당시 근무했던 내 일터 면사무소 당직이 월 2~3회 정도는 걸렸었다. 근데 내겐 늘 부담스러운 당직이었다. 도심이면 그나마 괜찮으련만 면사무소가 외진 곳 언덕 중턱...
그때 당시 사회초년생이라 차도 없는 내가 밤 9시에 청사 불 다 끄고 나와서 힐끗 청사를 뒤돌아보면 그 20대 어린 마음에 낮까진 괜찮았던 면사무소가 마치 귀곡산장으로만 보였다. 그 당시 당직인데 혼자 남게 되면 집에서 멀어도 그나마 차가 있던 남자 친구가 어떻게든 데리러 왔다. 하지만 피치 못한 상황으로 그가 데리러 오지 못할 땐 세콤 장치 후 "경비가 시작되었습니다." 안내 목소리를 듣는 동시에 나는 남자 친구와 통화하며 버스정류장까지 미친 듯이 뛰어야 했다.
그날도 면사무소 혼자 남게 되는 날이자, 나름대로 벌써 프러포즈 시나리오 그리는 날.
바쁜 업무시간이 끝나고 강당 한편에서 동료들이 웃고 떠들며 머리가 어질 해질 정도로 풍선을 불어 주다가 가긴 했지만, 남자 친구가 픽업 때 잠깐 강당 한편에서 작게 하는 소박한 프러포즈라 거창할 건 정말 없었다. 그럼에도 서무 직원에게 빔프로젝터 쓰는 법도 배웠고, 이제 이 남자만 오면 된다. 9시 즈음되니 면사무소 밖으로 차 소리가 난다. 괜스레 이럴 땐 더 반갑다.
"오빠~ 위층도 세콤해야 되니까 같이 가."
내 속마음은 이미 '내가 프러포즈할 테니 당신은 답정너 감동! 만 하면 돼'
강당을 문 여는 순간 풍선도 예쁘게 불어놨고, 군데군데 라이트초에 우리의 사진이 담긴 현수막도 걸어 소박하지만 누가 봐도 프러포즈 분위기가 났다. 남자 친구가 이 광경에 놀라며 잠시 미소를 뗐다. 그러는 사이 준비한 영상을 틀었다.
'잉? 뭐지? 악....'
영상 시범을 해봤어야 했는데 놓쳤더니 영상이 나오진 않고 소리만 난다. 아무리 용써봐도 안 나온다.
결국...
"오빠~ 안 되겠다. 이거 집에 가서 컴퓨터에 꽂아서 봐. 결론은... 나랑 결혼하자야!"
내가 그에게 줄 감동의 쓰나미를 불러올 영상 프러포즈는 이렇게 망해갔다. 남자 친구는 그저 이 상황이 웃기는지 그저 연신 웃어대기만 한다. 사실 이 어설픈 프러포즈에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결국 둘이 정리한답시고 힘들게 불어놓은 풍선 다 터트리고, 빗자루 질까지 하면서 분위기 있는 프러포즈는 이미 물 건너 갔고, 서로 깔깔거리느라 싱겁고 개그스러운 프러포즈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사실 그날 이후 남자 친구였던 남편은 내게 다시 프러포즈했다. 어땠을까?
역시나 또 한 번의 싱거운 프러포즈에 우리는 그저 깔깔대며 지나갔다. 그렇다고 서로의 끈끈한 사랑이 없는 건 아니니까... 거창해야 더 행복한 프러포즈는 아닌 거니까.
그렇게 우린 또 한 번 웃고 행복한 순간을 추억한다.
시간이 흘러 영상 속 축하 응원해준 민원대 동료들이 사무실에서 혼인신고 증명인으로 서명해줌과 동시에 혼인신고를 처리해주었다. 우리의 법적 결혼은 그렇게 시작하고 현재까지 무탈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