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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같이 행복하고 싶었어요.

제겐 에어컨이 너무 간절했어요.

by 눈꽃


제대로 가을이 왔다.

아침 환기 타임에 문을 열어두었더니 찬바람이 제대로 든다. 한여름 폭염에는 에어컨 없이는 한시도 못 살 것 같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찬바람은 들고, 에어컨 리모컨은 필요 없어졌다. 오늘 아침, 내년 여름까진 필요 없을 에어컨을 닦으며 생각나는 일화를 적어보고 싶다.



내겐 폭염 관련 뉴스와 에어컨만 보면 종종 생각나는 일화

(과거 직업병일 수도 있겠지만 유독 서민에겐 더 고통스러운 냉난방비가 많이 드는 계절이 싫다.)



나는 2008년 임용 후, 2022년 올해 몇 달 전 의원면직 한 전직 사회복지공무원이다. 힘들 때도 정말 많았지만, 경제적. 정서적으로 일어설 힘이 없는 분들께 관에서 조금씩 손을 잡아주어 그분들이 기뻐할 때, 그분들의 미소를 보면서 일터에서 힘을 얻을 때가 많았다. 지금은 여러 이유로 공무원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았지만, 굳이 다시 공무원을 한다면 여러 직렬 중 또다시 사회복지공무원을 택할 생각일 정도로 내겐 특별한 직업이었다.



주민센터에서 근무할 당시 알게 된 복지도우미 언니가 있었다. 복지도우미는 주민센터나 시청 등 사회복지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의 업무를 돕는 인력으로 사회복지공무원에겐 굉장히 필요한 분이다. 복지도우미는 몇 가지 자격요건의 경로로 들어올 수 있는데 같이 근무했던 복지도우미 언니는 한부모가정으로 정부의 도움을 받아서 생활하는 분이자 자활참여자로 근무하는 분이었다.



어느 날 정부 도움을 받고 있는 그 복지도우미 언니의 집을 업무 차 가정방문하게 되었다. 같이 근무하는 분이라 조심스럽지만, 나는 매의 눈으로 빠르게 집안을 스캔했다. 그런데...



'엇... 에어컨이 없다.... 어린아이들이 셋이나 되는 집에 에어컨이 없다...'



가정방문을 다녀온 후 나는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도 나는 일터의 일을 종종 분리시키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문득문득 방문했던 복지도우미 언니 집이 생각나는 거다. 다른 건 둘째치고 여름이 다가오는데 어린아이들이 셋이나 되는 집에 에어컨이 없다.



'내가 해드리고 싶다... 에어컨'



여러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막연히 해주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지만, 언니가 나보다 나이가 있기에 얘기를 꺼냈다가 혹여나 마음에 스크래치가 나진 않을까... 또 해드리려면 적은 금액이 아니라서 남편에게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나는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남편도 월급쟁이로 있다가 새로 일을 시작을 하려던 참이라 이미 경제적인 고민이 없진 않았던 때라 그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남편은 내게 늘 "yes"로 응하는 사람이지만 그걸 떠나서 나도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시기인 건 맞다. 새로 일을 하게 되면서 집 담보, 공무원연금 대출, 보험대출, 그 외에 남동생에게 부탁하며 빌린 돈까지 나도 경제적인 고민을 해야 하던 상황이었다. 결국 마음 불편한 채로 그렇게 폭염의 시기가 왔고, 집에서 에어컨을 틀어둘 때마다 종종 내 마음은 힘들게 흘러버렸다.



해가 바뀌었고, 또다시 계절은 바뀐다. 여름을 알리는지 슬슬 더운 공기가 감돈다. 또다시 잊고 있던 에어컨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전 해에 그렇게 마음 불편하게 넘어간 게 나를 너무 괴롭혔다.

아마 언니 혼자 살 거 같으면 아마 그런 마음까지는 못 미쳤을 거다. 하지만. 그저 아이들이 책을 읽더라도 조금이나마 쾌적한 온도에서 지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내가 경제적인 고민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폭염에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에어컨이 있다...'

결국, 가슴에만 담고 있던 말을 남편에게 내뱉었다.



"오빠... 미안한데 나 에어컨을 꼭 좀 해주고 싶은 분이 있어..."



남편은 내 얘기를 듣더니 두말 않고

"한창 여름 때는 에어컨 설치도 딜레이 돼. 하려면 빨리 해야 돼. 가자. 신발 신어. "



그간 나를 짓눌렀던 마음과 갑자기 드는 안도, 남편에게 고마움. 여러 감정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에어컨 판매점을 향했다. 열효율 1등급의 적당한 에어컨을 고른 후 어떤 식으로 언니에게 언급을 할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난 조심스럽게 연락을 해보았다.



"언니, 나 사실... 에어컨을 좀 해주고 싶어..."



물론 언니는 말은 고맙지만 괜찮다며 거절을 표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답정너의 마음이었던 터라 꼭 해주고 싶다는 조심스럽지만 내 강한 의사표시에 언니는 마지못해 주소를 불러주었다. 남편은 설치 시에 혹여나 추가 비용이 들지 모르니 추가 비용이 있을 경우 꼭 우리 번호로 해놓으라는 디테일한 의견까지 주었다. 추후 생각지 못한 앵글 설치 비용에 남편의 배려 깊은 센스가 돋보였다. 에어컨 설치와 동시에 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



출근했더니, 내 책상 위에 예쁜 양산이 놓여 있었다.

아무리 친한직원에게도 언급 자체를 안 했던 내용이라 이유를 알리 없는 직원들은 왜 내게만 양산을 선물해주냐고 군소리했지만, 나는 그저 언니를 향해 미소만 지어 보냈다. 퇴근길에 또 다른 복지도우미 분께 핸드폰 메시지가 왔다.



"OO아, 내가 더 고맙다. 넌 복 받을 거야."



특별히 답장은 하진 않았지만, 여름을 앞두고 안도할 언니의 얼굴과 마음 따뜻한 남편의 얼굴이 교차하며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 나는 시원한 에어컨 앞에서 마음은 따뜻해졌다.



에어컨이 필요 없어지는 시기에

에어컨이 절실히 필요했던 순간을 기억해본다.

그저 우리 같이 행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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