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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Oct 27. 2022

술도 커피처럼 소중히 대해줄걸

푸대접받은 오래된 연인에게 고함.

1. 

나는 커피 애호가이다. 


사실 요즈음은 ‘내가 애호가요’하고 자신 있게 말하기가 좀 꺼려지기는 하다. 각 분야에 능통한, 일명 ‘덕후’들이 워낙 많이 있기 때문이다. 방대한 양의 지식은 기본이요,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일상생활도 기꺼이 헌신하는 덕후들 앞에서 알량하고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애호가’라고 말하는 게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커피에 관해서라면 나도 제법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커피 애호가이다.’ 


나는 ‘아메리카노’라는 단어보다 ‘블랙커피’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던 시절부터 드립 커피를 마셨다. 학교 매점에서 아메리카노를 팔지 않던 시절, 그러니까 커피는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인터넷에서 커피 생두를 사다가 집 베란다에서 로스팅했다. 슈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원두는 볶은 지 한참 되어 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래되어 커피 기름에 절어있기 일쑤였고, 맛있는 원두를 구할 수 있는 로스터리샵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직접 로스팅한 원두는 그때그때 갈아서 휴대용 드립퍼에 담아서 들고 다녔다. 도서관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휴게실로 가서 뜨거운 물을 받아 휴대용 드립퍼로 커피를 직접 내려 마셨다. ‘드립 커피’라는 단어도 생소한 시절에 정말이지 대단한 광기였다. 


집에 돌아오면 각종 드립법을 연습하였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여러 종류의 커피 추출 도구를 사 모았다. 드립 커피가 시들해질 때 즈음에는 저렴한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을 장만했다. 그리고 점점 더 비싼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업그레이드 하기 시작했다. 실력 없는 이들이 으레 도구 탓을 하는 것처럼 나도 내가 내린 에스프레소가 성에 차지 않는 이유를 머신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종국에는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땄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커피 애호가이다. 


2. 

내가 커피만큼 좋아하는 음료가 또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술’이다. 커피보다 더 일찍 좋아하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커피보다 많이 마셨을지도 모른다. 특히 간이 싱싱했던 젊은 날에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많이도 마셨다. 온 우주가 나에게 술을 권하는 대학교 새내기 시절이야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간혹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맥주 한두 캔을 사 와서 마시고는 했다. 


원치 않는 외국살이를 하게 되었을 때에도 내 캐리어 안에는 면세범위를 꽉 채운 팩소주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고국이 생각나면 소주를 마셨다. 한 번은 외국에서 누룩을 구해다가 막걸리를 직접 담가먹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한국 술과 함께 먹으면 낯선 음식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한국 술은 나의 향수병을 훌륭하게 달래주었다. 


그렇다고 외국에서조차 한국 술만 마신 것은 아니다. 낯선 외국의 슈퍼마켓에서 술을 구경하는 것은 타향살이의 몇 안 되는 즐거움이었다. 그 나라 언어를 전혀 모르니 -그 당시에는 번역기의 성능이 형편없었다.- 술병 디자인이나 패키지만 보고 술을 골라야 했다. 그런 날은 제법 공을 들여 요리를 하고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새로 고른 술을 오픈했다. 가끔은 형편없는 술이 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마음에 들었다. 성격이 예민하고 불안감이 높은 나에게 타향살이는 긴장에 연속이었다. 낮에는 열심히 일을 하고, 밤에는 맛있는 술로 긴장을 풀었다. 술은 나에게 위안이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애주가’라고 소개하기에는 여전히 민망하다. 많이 마시기만 하였지 술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맥주도, 와인도, 소주도, 양주도, 사케도, 그리고 칵테일도 모두 다 잘 마시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술이 무엇이냐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다. 


맥주 애호가를 만나도 라거니 에일이니 IPA니 하는 간단한 맥주 종류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대화가 진전이 안 된다.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 상면발효나 하면발효같은 기본 주조 용어도 전혀 모른다. 그렇다고 와인을 좋아한다고 대답하기도 곤란하다. 떼루와나 빈티지 같은 것은 모르더라도 최소한 떫은맛이 강한 와인은 싫다든지 무게감 있는 와인이 좋다든지 하는 정도의 대략적인 취향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없다. 양주도 위스키니 진이니 럼이니 하는 것 정도는 대강이라도 찾아볼 법 한데, 그냥 비싸고 갈색 빛깔이 나는 술을 양주라 부르며 마시고 있다. 


뭐 술 마시는 데 그런 것을 꼭 알아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애호가라는 사람이 ‘라벨 디자인만 보고 와인을 삽니다. 그래서 매번 복불복 게임을 하는 것 같아요.’라든지, ‘양주는 아버지께서 직장생활 하시며 선물로 받은 것을 축내고 있습니다. 역시 면세점에서 산 양주가 맛있네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4.

커피도 술도 ‘나’라는 같은 인간이 마셨는데, 왜 그렇게 차별했을까.


나는 커피를 마치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처럼 귀하게 대접했다. 좋아하니까 커피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커피를 탐구하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행여나 작은 부분이라도 놓칠까 봐 살피고 또 살폈다. 


하지만 술은 푸대접했다. 마치 무덤덤해져서 더 이상 정성을 쏟지 않는 오래된 애인처럼 대했다. 오래된 애인을 푸대접하면 안 되는 것처럼 술도 푸대접하지 말았어야 했다. 세상살이가 힘이 들면 맡겨놓은 듯 위로를 받았고, 외로울 때면 당연한 듯이 함께 있어 달라고 했으면서 술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5. 

이렇게 술을 푸대접한 것이 후회가 된다. 오랜 기간을 함께했는데도 추억이 없어 허무한 느낌이다. 

처음으로 술을 마시던 20세로 돌아간다면 한 잔 한 잔 음미하며 귀하게 마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마신 술이 어떤 술인지 궁금해하고 알아보며 마실 것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아는 체하기 위해서 공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힘들 때 위로해 주었던 술은 어떤 녀석인지, 좋은 일에 함께 기뻐해 준 술은 어떤 녀석인지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또다시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좋은 녀석들과 다시 만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시지 않았다면- 내가 마신 술은 그날의 기분과 함께 잘 기록해 놓고 싶다.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는데 내가 어떤 브랜드의, 어떤 맛의 술을 좋아하는지, 내가 마셔본 술은 몇 종류나 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속상하다. 사진은 그렇게 열심히 찍었으면서 왜 술은 사진을 찍지도, 기록하지도 않았을까. 마신 술도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인데 그 소중한 추억을 아까운 줄 모르고 흘려보낸 것이 후회가 된다.  




 

+후회 그 후

나는 요즘 커피에 예전만큼 정성을 쏟지 않는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처럼 ‘커피의 끝은 캡슐 커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결국 나도 그렇게 되었다. 온갖 베리에이션 커피와 미묘한 커피 맛의 차이에 집착하는 피로한 시기를 지난 것이다. 이 시기를 지나고 나니 어느 정도 맛이 보장된다면 편한 게 제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캡슐 커피 대신에 자동 커피머신을 7년 넘게 사용하고 있다. 그라인더도 템핑도 필요 없이 내 스타일의 원두만 넣으면 제법 훌륭한 커피를 추출해주니 좋다. 이렇게 평소에는 무난한 커피를 마시다가, 기분이 동하면 언제든지 특별한 커피를 마시면 된다. 


반면 술에는 예전보다 정성을 쏟는다. 안정기에 접어든 아이돌 가수 덕질은 적당히 하고, 오래된 연인에게 뒤늦게 정성을 쏟는 모양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옛 애인을 위해 호기롭게 조주기능사 책을 구매하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출산 후에 주량이 급격하게 줄어서 이제는 술 한 잔이 더욱 소중해졌다. 이런 비루한 주량을 가지고 복불복 게임하듯 맛없는 술을 마실 수는 없으니, 한 잔 한 잔 음미하며, 공부하며 귀하게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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