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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Oct 05. 2023

1. 시작부터 싸워버렸지만

미국에 간다는 말에 미음님이 말했다. 

언니, 인종 차별 당해도 싸우지 마요. 거기선 재수 없음 총 맞아요. 


이런. 솔뫼한테도 비슷한 말을 들었는데.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지만 무례한 사람도 있어. 웬만하면 그런가 보다 해.


어라? 나 싸움쟁이였나?

아니. 그럴 리가.

어디서 큰소리만 나도 온몸이 쪼그라드는 세상 겁보쫄보인 걸. 평생 친구랑 다퉈본 것도 두어 번이나 될까? 인종 차별이야 하는 인간들이 문제지. 말도 안 통할 사람들이랑 싸워 뭐 해. 


솔뫼가 미국 입국 심사대가 유난해서 혹시나, 하고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 한번 안 가본 나도 미국 입국 심사대 에피소드를 적잖이 들었다. 그래,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입국 심사라는 일 자체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으니까.


알았어. 안 싸울게. 걱정하지 마.


나는 웃으며 솔뫼를 안심시키고는 힘차게 입국 심사대에 들어섰다. 그리고 5분쯤 후 나는 입국 심사관과 싸우고 있었다.     



질문은 단순했다. 딱히 예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뻔한 질문들에 뻔한 답변을 했다.


여긴 왜 왔어? 

친구 만나러.


돌아가는 비행기 표 있어?

그럼. 


여기에 왜 90일이나 있어?

친구랑 실컷 놀고 싶어서. 제일 친한 친구야.


90일 동안 뭐 할 건데?

여기저기 여행 다니고 맛있는 것 먹을 거야.

(이때까지도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한 상태.)


90일 동안이나? 친구는 뭐 하는데?

친구는 출근하지. 친구는 일해. 직장인이야.


친구가 출근하는데 너는 여기서 놀기만 한다고? 90일 동안이나?

(날카로워지는 눈초리에 질문의 본질을 깨달았다.)

아아, 내가 글 쓰는 사람이거든. 나는 쓰던 글 마저 작업할 거야. 

환기도 하고 충전도 하면서. 

그리고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이곳에 관한 산문도 쓰려고 해. 


너 돈은 있어?

아니, 없는데. 

(심사관의 눈초리가 더할 수 없이 매서워졌다. 나는 돈이 없어서 없다고 한 건데 뭐가 문제지, 어리둥절. 돈 없으면 미국 비자받기 어렵다는 건 아는데 나는 그냥 ESTA로 잠깐 머물러 온 거니까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달러야 친구한테 환전하면 되니까 굳이 한국에서 가져올 필요가 없었던 거고. 당연히 무지한 인간의 착각이었음을.)


돈 없다고?

응!

(그 와중에 자신 있게 대답한 나-_-)


돈이 없는데 여기서 90일을 머문다고? 

응.  

(나 걱정해 주는 건가? 한국 돈은 있는데…… 생각하다 불법 취업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또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 나 카드 있어! 현금이 없다는 거야. 

(심사관은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댔다. 당연함.) 


무슨 카드 있는데?

비자카드.  

(카드라도 보여줘야 하나 싶어 주섬주섬 꺼내려 한 나. 이쯤 되면 나도 참 할 말이 없긴 한데-_-)


그래서 90일 동안 뭘 할 건데?

……? 

좀 전에 말했잖아. 나 친구 만나러 왔다고.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바꿔 물어보기도 한다고 솔뫼가 말해주었다, 좀 전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빈정대는 듯한 말투에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논다고? 90일 동안이나?

나 글 쓸 거라고 말했어. 제일 친한 친구라니까. 친구 만나러 왔어. 

친구 만나서 친구랑 해브 어 굿 타임하러 온 건데 안 돼? 

내가 뭐, 더 설명을 해야 돼?      


심사관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사실입니다)를 한심하다는 듯 보며 내가 건넸던 여권과 서류를 돌려주었다. 그냥 그 정도로 지나쳤으면 되었다. 서로 아, 저 인간 짜증나네, 하고 말았을 거였다. 내가 여권과 서류를 받아 넣으며 기어코 한 마디를 덧붙이지만 않았다면. 


근데 너 좀 친절하게 대해줄 순 없어? 나 미국 처음 왔어.


근데 너 때문에 나 지금 되게 불쾌하고 미국 첫인상 완전 나빠졌어, 까진 말하지 않았지만…… 눈이 있는 사람이면 내 티꺼운 표정을 못 볼 수가 없었을 테고…… 하여 그는 뭐라고? 라고 물었다. 나는 또 그가 못 들어서 되묻는 거라고 착각을 하여(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됐어, 신경 쓰지 마, 라고 지나가려 했다. 나름 참은 거였다. 이게? 라고 묻는다면 나름은요, 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데…… 하여튼 심사관은 가려는 나를 굳이 붙잡고 방금 뭐라고 했냐고 다시 물었다. 내 답이 마음에 안 들어서 붙들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눈치마저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냥, 싸우기로 했다.


아, 웰컴한다며!


너 좀 친절하게 대해줄 순 없냐고 했어. 


내가 친절하지 않았어?

응.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야. 이런 걸 묻고 조사하는 게 내 일이야. 

알아. 그러니까 그냥 됐다고 했잖아.


그리고 나는 지금 충분히 친절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심사관이 갑자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는데 이때 조금 무서웠다. 쓰면서 생각하니 다른 순간에 무서웠어야 하지 않은가 싶긴 하네. 네, 죄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난 친구들한테도 이렇게 말해. 

(내 알 바인지? 내가 당신 친구도 아닌데.) 

오케이, 오케이, 알았어.  


한국 입국 심사관들은 한국을 방문하는 미국인들에게 친절해?  

응. 그들은 친절해.

(순간 아닐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게 다툼의 본질은 아니니 우기고 넘어갔다. 적어도 미국인들한테 막 대할 것 같진 않았고.)

나 이제 가고 싶은데. 가도 돼?      


심사관은 환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까딱했고 나 또한 환멸스러운 얼굴로 심사대를 지나쳤다. 그새 입에 붙어버린 고마워 좋은 하루 보내, 라는 말을 던지듯 내뱉으면서. 하나도 안 고맙고 피차 좋은 하루는 아니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미국에 도착했다. 러시아가 빌어먹을 전쟁을 일으키신 덕에 장장 15시간을 날아서, 경유지에 머무른 시간까지 포함하면 18시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내가 90일 동안 친구랑 해브 어 굿 타임할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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