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주로에서는 잠시 대기를 해야 했다. 뇌우가 쳐서 게이트를 열 수가 없다고 했다. 솔뫼 말로는 이곳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고 했다. 365일이면 360일 쾌청한 곳이라고. 그런데 내가 오는 날, 비가 오고 번개까지 치다니. 창밖을 보니 과연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하필 도착한 날 날이 궂다니, 좋지 못한 징조가 아닐까……라고 걱정은커녕 오, 내가 온 날 드문 비가 오다니, 내가 반가운 비와 함께 온 거잖아, 예감이 좋은데, 라고 생각하며 혼자 들떴다. 얼마 후 게이트가 열렸고 비행기에서 내리는 나의 발걸음은 15시간을 날아온 사람치고는 꽤나 가벼웠다.
그닥 긍정적이거나 낙관적인 편은 아닌데 점점 좋은 쪽으로 생각하게 된다. 특히나 어디론가 떠났을 때에는. 이러면 이런 대로, 저러면 저런 대로 좋다. 힘들고 기분 상할 만한 일이 생겨도 추억 하나 만들었다 하고 넘긴다(그래서 입국 심사관님과의 에피소드도 추억이 되었냐 하면…… 아니, 근데 그 사람 말투가 진짜……).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마음이 그렇게 흘러간다. 나이를 먹어 여유가 생기는 걸까. 그저 화내거나 짜증을 낼 기력이 딸려서일지도.
우버 택시를 탈 때쯤에는 비가 그쳤다. 젖은 도로에는 가로등도, 지나는 차도 거의 없었다. 한국의 소도시 어딘가를 달리고 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는데 라디오에선 익숙지 않은 언어와 익숙지 않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낯선 곳에 왔다는 걸 일깨워 주듯이.
낯선 곳에 도착하면 늘 묘하게 쓸쓸해지고 만다. 사람들과 왁자지껄 몰려가도 그렇다. 누구와 함께여도 인생은 혼자. 어디서도 인생은 혼자. 결국 끝내는 혼자. 그런 말들을 새삼스레 떠올린다. 그리고 그 묘한 쓸쓸함이 도무지 싫지가 않다.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일까.
나는 어느 시점부터 덤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나에게 삶은, 어쩌면 할 수 없었던 것, 하지 못했을 것,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들을 겪어보는 과정이다. 그중에는 좋은 것도 힘든 것도 있지만 나쁘지 않다. 대체로 좋다. 이렇게 말할 수 있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참으로 어리고 어리석은 탓에.
그런 나지만 나쁘지 않다. 대체로 좋은 편……인지까지는 자신할 수 없겠으나.
유타주는 미국 역사가 대부분 그러하듯 백인들이 아메리카 선주민들을 쫓아내고 탈취한 곳이다. 유타주의 경우는 일명 몰몬교라고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교인들이었다. 일부다처제 같은 교리 때문에 미국 내에서 쫓기듯 옮겨 다니던 이들이 여기까지 밀려왔고 당시만 해도 이곳은 멕시코 땅이었다. 멕시코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유타주를 비롯한 엄청난 면적의 땅을 미국에 빼앗겼고 후기 성도 교회에서는 기금까지 조성하며 적극적으로 교인들을 불러 모아 유타를 자신들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런 역사를 가졌으니 유타주에서 후기 성도 교회의 영향력은 여러 모로 막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유타주의 주도인 솔트레이크시티야 말할 것도 없고. 실제로 인구 절반 이상이 후기 성도 교인들이라고 했다. 이것도 코비드 19로 인한 팬데믹 이후 테크 산업들이 대거 이전해 오면서 줄어든 비율이라고.
솔트레이크시티에는 후기 성도 교회의 총본산인 템플스퀘어가 있는데 간단히 템플이라고 불린다. 후기 성도 교회가 아닌 교회와 성당, 사원 들이 있지만 템플이라고 하면 템플스퀘어다. 이곳의 주소는 모두 이 템플을 기준으로 매겨진다. 300S 800E라고 하면 템플로부터 남쪽으로 세 블록, 동쪽으로 여덟 블록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솔뫼의 집은 템플의 남쪽에 있었다. 신축 아파트답게 깔끔하고 넓었다. 커다란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오븐, 식기세척기, 수납장과 아일랜드 테이블이 기본으로 딸려 있었다. 화장실은 건식, 침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다. 층고가 높고 벽에는 하얀 페인트가 발려져 있다. 역시 집은 층고가 높아야 해. 여기에 비하면 2/3 가량 납작한 한국 집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발코니로 나가니 젖은 풀냄새가 났다. 풍경은 낯설었지만 풀냄새만은 익숙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풀냄새는 같구나. 잘 부탁해. 조용히 인사를 건네며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내내 잠을 잤는데도 그날 나는 단잠을 잤다. 다음날 거실 커튼을 열었을 때 정면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햇살은 눈부시게 강렬했고 나는 이곳을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