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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Oct 07. 2023

4. 와식생활자에게도 루틴은 있어

누워만 있다고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인간은 그렇게 납작하고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누구라도 그렇다. 꼬박꼬박 일정 시간 이상을 누워 있기 위해서는 성실함이 필수다. 해서 나에게도 루틴이라는 것이 있다. 


하루의 루틴이라고 하면 흔히 기상부터 꼽겠지만 내겐 잠이 드는 것부터 루틴의 시작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불면증을 앓고 있는데 불면증 치료를 위해서는 같은 시간에 자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게 좋다고 한다. 직장 다닐 때는 반 강제적으로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는데 효과는 별로 없었고 기계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에 더 우울하고 피곤하기만 했다. 


지금은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다만 잠이 드는 시간대를 11시와 1시 사이로 잡아두었다. 나는 내가 좋아야, 내가 좋으려고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앞에서도 말했는데 이는 곧 의무로 무언가 하는 걸 안 좋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것도 의무가 되면 별로다. 흥미가 떨어지고 찌꺼기가 생긴다. 그런 나를 알기에 루틴도 느슨하게 정해둔다. 느슨한 루틴을 느슨하게 지키기. 이게 내 루틴의 대원칙이다. 잠들기의 경우에는 가급적 새벽 1시 전까지는 잠들기, 친구들과 놀거나 너무 좋은 책을 읽어 흥분했거나 어느 것도 아니지만 그냥 왠지 안 자고 싶은 날에는 안 지켜도 됨, 다만 이런 날들을 너무 많이, 연속적으로 만들지는 말자, 정도가 된다. 


그렇게 잠이 들어 눈이 떠질 때 일어난다. 6시간이든, 8시간이든 상관없다. 자고픈 만큼 잔다. 내가 깰 때가 일어날 때다. 알람 따위 당연히 없다. 이렇게 자고 나면 누군가는 온몸이 상쾌하고 배터리를 갈아 끼운 양 호랑이 기운이 솟는다는데 나에게는 그야말로 전래동화 속 호랑이 같은 이야기다. 에너지가 뻗쳐 주체를 못 한다는 유년기에도, 쇠도 씹어 삼킨다는 10대에도 그런 날은 없었다. 둥근 해가 떴으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를 닦고 세수하고 밥은 꼭꼭 씹어 먹은 다음 씩씩하게 집을 나서는 일 따위는 평생 없었다는 얘기다. 자고나도 졸립고 힘이 없고 시들시들 늘어지기만 하는 게 나의 아침이었다. 


트레이더조 마트에서 할로윈 기념으로 나눠주는 스티커가 귀여워 따라 그려보았다. 실물이 훨씬 귀엽지만 :)


지금도 그렇다. 호떡 반죽처럼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만이 달라졌다. 그 하나가 내 삶의 만족도를 얼마나 올렸는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돈을 못 벌고 앞날은 불안하기만 해도 ‘짓는 사람’으로 사는 게 그저 행복한 데도 이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 호떡 반죽 상태로 늘어져 있을 수 있는 것, 비몽사몽으로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 나는 이것들을 돈이나 사회적 지위, 효율성 같은 가치와 맞바꾸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어리석다 하겠지. 안다. 그런데 나한텐 돈이나 사회적 지위, 효율성보다 이것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기꺼이 맞바꾼다. 맞바꾸면서 교환 가치가 지나치게 불리하고 편협하다는 생각을 하고, 이 교환 행위의 기준을 총체적으로 재고해야 한다고도 생각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세상은 내가 바라는 정반대 방향으로 바뀌어 갈 뿐이니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이 아닐 수 없다.       


그럼 호떡 반죽 상태로 무엇을 하느냐? 거실로 나와 요가 매트를 깐다. 마사지볼 위를 굴러다니며 전신을 풀어준다. 순서는 없고 그날 몸 상태와 기분, 가능한 시간에 따라 마음대로 하는데 시작은 언제나 같은 동작이다. 무릎 꿇고 앉은 채로 공을 종아리와 허벅지 사이에 끼우는 것. 이건 아주 오래 전 두물머리 개발 반대 자전거 행진을 갔을 때 참가자 선생님이 알려주신 팁이다.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출발해 양평 두물머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일정이었는데 자전거복에 헬맷을 쓰고 갔더니 사람들은 내가 자전거를 좀 타는 줄 알았다. 그럴 리가. 힘이 딸리고 경험이 부족하여 장비에 의존한 것뿐이다. 기세 좋게 선두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뒤처졌고 결국 낙오되었다. 주최자 선생님이 나를 주우러 오느라 한참을 더 달려야 했다. 


두물머리에 도착했을 때는 어두컴컴한 밤이었고 사람들은 그래도 미니벨로로 여기까지 온 게 대단하다고들 해주었다. 착한 사람들 같으니. 하지만 그중에는 쌀집 자전거라고 부르는 무기능 자전거를 타고 온 분도 있었기에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는데 그 마음을 표현할 여력이 없었다. 너무 힘들었다. 아이씨, 멀쩡한 강은 왜 갈아엎는다고 난리를 쳐가지고, 내가 진짜. 


완전히 방전되어버린 내가 안쓰러웠는지 한 참가자 선생님이 다리 푸는 법을 알려주었다. 할 때는 너무 아픈데 자고 일어나면 다리가 하나도 안 아플 거라고. 안 그래도 고질적인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던 지라 돌아가자마자 당장 해보았고 경고대로 할 때는 정말 아파서 악 소리가 났다. 다음날 하나도 안 아픈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통증이 덜했다. 이후로 거의 매일, 여행을 가서는 특히나 더 열심히 해준다. 그분의 이름을 모르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마사지를 할 때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 다음은 되는 대로. 척추를 따라 공을 굴려주고 앉아 있느라 뭉친 엉덩이도 살살, 목 뒤 움푹한 곳에 넣어 도리도리도 해준다. 배를 눌러주면 허리 심부 근육을 풀어주어 허리나 다리 통증이 한결 덜어진다. 가능한 매일 하려고 하는데 배는 장기 때문에 예민한 부위라 살살 해야 한다. 옆구리에 가까운 배, 아랫배, 배와 다리의 연결 부분을 골고루 풀어주고 내키면 허벅지도 앞으로 옆으로 굴려준다. 처음에는 폼롤러를 이용하다가 마사지 볼로 바꾸었다. 자극 부위가 좀 더 다양하고 자극 강도를 조절하기 수월하다. 


스미스 마트의 어린이를 위한 공짜 과일 박스. 멋있다!


그 다음에는 아침을 먹는다. 한국에서는 점심을 먹었는데 이곳에 오면서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시차 적응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인지 니은님 말대로 미국 체질이라서인지 모르겠는데 나쁘지 않아서 유지 중이다. 


아침 메뉴는 거의 같다. 제철 과일과 야채, 견과류가 주를 이루고 나머지는 마음 가는 대로. 이렇게 말하면 식이 관리를 하는 줄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살면서 식이라는 걸 관리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먹는 게 너무 좋아서, 살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에 하나라 생각해서 먹고 싶은 걸 언제나 늘 마음껏 먹는다. 좋아서 먹는다는 얘기다. 


과일은 어려서부터 과수원에 시집보내야 되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좋아했고 생야채를 일정량 먹어주지 않으면 몸의 신선도가 떨어지는 기분이다. 견과류 중에서는 짭쪼롬하게 구운 캐슈넛과 마카다미아를 좋아하고 크래커나 바게트, 식빵, 또띠아칩을 밥 삼아 먹는다. 곁들임 메뉴는 치즈, 버터, 오이 피클, 블랙 올리브, 요거트, 시리얼, 삶은 계란 혹은 메추리알, 병아리콩 등등 다양하다. 과일이 계절마다 바뀌고 생야채는 종류별로 바꿔가며 먹고 곁들임 메뉴도 자주 바꾸니 이렇게 첫 끼를 먹은 지 수년째인데 조금도 질리지 않는다. 


솔트레이크시티에서는 새로운 곁들임 메뉴가 추가되었다. 바로 피꼬 데 가요peco de gallo. 위키피디아에 검색해 보니 잘게 썬 토마토와 양파, 세라노 고추(할라피뇨나 하바네로 고추로 대체 가능), 고수 잎을 라임 주스와 소금으로 버무린 것이다. 또띠아나 파지타에 곁들여 먹기도 하고 요리할 때 양념으로 넣기도 한다. 재료 색깔이 멕시칸 국기 색깔과 같아서 일명 플래그 소스flag sause, 살사 반데라salsa bandera라고도 불린단다. 발음은 마트 점원 선생님에게 배웠다. 영어 발음대로 피코 드 갈로는 어디 있어? 하고 물었더니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아, 피꼬 데 가요, 그건 신선 식품 코너에도 있고 양념 코너에도 있어, 라고 알려주었다. 


한국에서도 살사 소스를 종종 곁들여 먹곤 했지만 이건 훨씬 가볍고 상큼하다(한국에서 먹던 살사 소스는 ‘살사 소스’라고 해서 따로 판다. 그것도 셀 수 없이 많은 종류로!). 시험 삼아 작은 통으로 샀다가 한 끼만에 거의 한 통을 비우고는 큰 통으로 산다. 과카몰리, 사워크림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어서 세트 구매. 


아예 세트로 파는 제품도 있다. 피꼬 데 가요와 과카몰리를 예쁘게 쌓은 2단 컵, 피꼬 데 가요와 과카몰리, 핀토빈 소스까지 쌓은 3단 컵은 보는 것부터 아름답다. 하지만 그런 컵 하나로 만족할 수 없는 먹보인 나는 따로따로 한 통씩 산다. 푹푹 떠서 한 그릇에 담은 다음 따로도 먹고 옛날 빙수마냥 섞어 먹기도 한다. 상큼하고 달콤하고 쌉싸름하고, 요 한 그릇이 주는 맛과 포만감은 살사 댄스를 추고 싶을 정도로 흥겹다.      


내가 사랑하는 멕시칸 살사 3대장!


신나게 배를 채우고 나면 양치를 하고 기분 따라 씻거나 말거나, 그리고는 책상 앞으로 간다. 노트북을 켜고 작업 중인 한글 파일을 연다. 두어 시간 글을 쓰고 나면 졸음이 밀려오고 저로선 최선을 다했습니다, 누구에게랄지 모를 변명을 하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낮잠을 잔다. 


낮잠은 빠지지 않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루틴이다. 평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나는 꾸준히 낮잠을 잤다. 첫 직장 첫 출근을 한 날도 낮잠을 잤다. 첫날에도 잤는데 두 번째, 세 번째 날에는 못 잘쏘냐. 죽 잤다. 외근이나 행사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잤다. 


회사를 그만두고 교정교열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서도 낮잠은 빼놓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어째선지 부사장님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쿠션을 베고 엎드려 잤다. 며칠 후 선배가 나를 불러내 많이 피곤하냐, 조심스레 물었다. 낮잠을 꼭 자야 하는지 둘러 물은 건데 나는 꼭 자야 한다고 답했다. 


왜 자냐면 자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굉장한 저체력자, 저효율 인간이라 중간 중간 기력을 보충해주지 않으면 방전되어 버린다. 기력 보충은 잠과 간식으로 한다. 잠과 간식으로만 가능하다. 카페인에 예민해서 커피도 못 마신다. 잠시 일어나 맨손 체조를 하거나 복도를 걸어보아도 다시 앉으면 도로 졸립다. 


잠을 깨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자는 거다. 졸음을 참느라 커피를 마시고 맨손 체조를 한다고 20분을 쓰느니 일하는 것도 자는 것도 아닌 상태로 30분을 낭비하느니 그냥 깔끔하게 10분, 20분 자는 게 낫다. 그러고 나면 게임에서 포션 채운 마냥 쌩쌩해지는데 안 잘 이유가.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는 날까지도 꾸준히 낮잠을 잔 나는 프리랜서가 되고부터는 더욱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낮잠을 즐긴다. 


낮잠에서 깨고 나면 다시 책상 앞이다. 나는 낮잠을 꽤 깊게 자서 앞에서 말한 누워서 하는 운동과 스트레칭을 해도 잠이 다 깨지 않는다. 멍한 채로 글을 쓰는데 나는 이 상태를 좋아한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점심을 먹고 쿠션에(그렇다, 나는 어딜 가든 쿠션을 지참하는 준비된 낮잠꾸러기였다!) 얼굴을 파묻고 침을 흘리며 자고 나면 늘 얼떨떨한 기분으로 5교시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때는 무슨 과목이든 늘 좋았다. 몽롱한 감각이 신기해선지 이완된 상태가 좋은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비슷한 감각으로 글을 쓰는데 안 풀렸던 대목이 저도 모르게 풀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짝 떠오르기도 한다. 실제로 낮잠이 창의성이나 일의 효율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연구가 많은데 나는 필시 이건 나 같은 낮잠꾸러기 선생님들이 낮잠 못 자게 하는 직장과 상사들에게 이를 갈며 밝혀낸 결과가 아닐까 추측한다. 유치원에서처럼 일하는 이들 모두에게 의무적으로 낮잠 시간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이 조금은 더 행복해질 거라고도. 한국에서는 그걸 악용해 낮잠 시간에도 일을 시키거나 수당 없는 추가 근무를 시킬 것 같긴 하다만.      

저녁 준비를 하고 솔뫼가 돌아오면 함께 저녁을 먹는다. 메뉴는 주로 한식. 여기까지 와서 왜 한식을, 이라고 한탄하는 이가 있다면 나도 동감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까 대체 왜. 나도 모르겠다. 솔뫼가 오사카에서 일할 때 1년 반 가량 오사카에서 지냈는데 그때도 그렇게 한식을 먹었더랬다. 내가 그렇게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하면 아니오. 한국에서도 한식을 매일 먹는가, 하면 아니오. 한식 아니면 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역시 아니오다. 갑작스레 바뀐 환경으로 인한 방어 기제가 아닐까 솔뫼와 둘이서 추측한 바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 와서도 나는 한식 한식 한식을 먹고 있다. 


다행히 그때보다 상황이 더 나아져 레토르트 식품들은 더욱 다양해졌고, 미국치고는 거주 한국인이 비교적 적은 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제품과 반찬을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다. 배달까진 어렵지만 인터넷으로 주문도 가능하다. 


그제는 민물새우 아욱국을 어제는 양념 갈비를 먹었고 오늘은 제주 산방식당 밀면을 먹을 예정이다. 나물 반찬에 냉동 파전과 빈대떡을 한 장씩 부쳐서 야무지게 먹을 거다. 


우리의 한식을 책임져 주시는 서울마트의 귀여운 홍보 문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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