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과 과일 디저트까지 먹고 나면, 자유 시간이다. 죽 자유롭지 않았던가? 생각이 든다면 느낌 탓이다.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면서 최대한 늘어져 있는다. 다시 호떡 반죽으로 돌아가는 시간. 무음으로 설정해두어 보지 못한 메시지들에 답을 하고 소소한 수다를 떨기도 하고 한국에선 뜸했던 가족들에게 일상도 공유한다. 미국에 오기 전 니은님이 일일보고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지쳐서 못할 때가 많다. 대신 할 수 있을 때 가급적 많이 이곳에서의 생활을 나누려 한다.
그림도 그린다.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해 처음 마트로 장을 보러 간 날 문구 코너를 지나다 문득 이곳에 머무는 시간들을 그림으로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 그리는 건 원래도 좋아했다. 못 그리지만 재미있어서 원데이 클래스를 들어본 적도 있고(선생님께 예상 외로 나쁘지 않다는 평을 들었다. 선생님, 대체 어떤 예상을 하셨던 거죠?), 한때는 수채화 물감에 팔레트, 붓까지 갖추고 열심이었다.
여기서는 단촐하게.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스케치북에 색연필만 샀다. 색연필은 12색, 24색, 36색 중 어느 걸로 할지 고민하고 있자 솔뫼가 36색 색연필로 골라주었다. 36색이나 쓸 정도의 실력이 아닌데, 민망하면서도 실력이 비루하니 색이라도 많이 쓰자는 마음으로 감사히 받아들었다.
좋았던 풍경, 인상적이었던 사물, 오래도록 남기고 싶은 순간들을 그린다. 제일 처음 그린 그림은 멕시코 식당 레드 이구아나의 나초칩. 타코도 맛있었지만 나초칩이 정말 바삭하고 고소해서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는 트레이더조 마트에서 할로윈 기념으로 나눠준 스티커, 그 다음으로는 유타에 처음 생긴 한국인 빵집인 문 베이커리, 스미스 마트의 아이들을 위한 공짜 과일 박스, 포장이 너무 예뻐 눈이 달콤했던 초콜릿 패키지들과 어느 베트남 식당에서 본 벽화 같은 것들을 그렸다. 보통 하루 만에 완성하는데 이틀 사흘씩 걸려 그리는 그림도 있다.
지금은 멕시코 음식점에 걸려 있던 프리다 칼로 선생님의 초상화를 그려보고 있는데 그릴 때마다 선생님께 죄를 짓는 기분이다. 프리다 칼로의 초상이라 하면 보는 이의 심장을 찌를 듯한 강렬한 눈썹과 눈매, 눈빛이 핵심일진대 내 그림 속 선생님은 졸려서 쓰러지기 직전이시다. 눈을 강조하려고 색연필 대신 펜을 썼더니 고치지도 못하고 덧그리면 덧그릴수록 흐리멍텅해지고 계시다. 내 어설픈 그림 작업을 열심히 응원해주는 동생조차 음 눈이 망했네, 라고 말했다. 눈이 생명인데, 눈이 생명인데!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이게 최선이니 완성만 해보자, 는 마음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사흘을 들였는데도 절반도 못 했다. 프리다 칼로 선생님이 보시면 황당하기 그지없으시겠지만 그래도 공을 들이고 있는 이 마음만은 알아주시리라 믿는다.
휴대폰으로 사교 활동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배가 적당히 꺼지면 아파트 1층 짐으로 간다. 이 아파트에는 공용 공간이 제법 잘 꾸며져 있다. 로비에는 소파와 테이블이 여러 개, 커피 머신이 있고 티백, 카라멜들이 놓여 있다. 별도로 분리되어 있는 라운지에는 소파와 테이블, 탁구대, 싱크대가 있어서 손님들이 올 때 이용하기 좋다. 짐은 맨구석에 있는데 크진 않지만 있을 건 다 있어서 만족하며 사용 중이다. 30-40분 유산소, 10분 유산소-30분 상하체 근력운동-10분 유산소 코스로 번갈아가며 하고 일주일이면 두세 번쯤 간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도 있고 혼자 쓸 때도 있다. 혼자 전세 내고 쓸 때는 이어폰 대신 휴대폰 스피커로 크게 음악을 틀기도 한다.
그러고 올라와서는 샤워를 하고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며 책을 읽는다. 책의 물성을 좋아하여 종이책만 읽지만 여기서는 어쩔 수 없다. 솔뫼의 전자책 리더기로 전자책을 본다. 오사카에서 지낼 때도 이 리더기를 애용했는데 그 사이 전자책 종류도 늘고 플랫폼까지 다양해져 문제 없이, 훨씬 즐겁게 독서 생활을 영위 중이다.
책을 읽다 졸리면 수면제를 먹고 화장실에 간다. 수면제를 장기 복용하면 수면제를 먹었는지 깜박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화장실에 가서 가글을 하고 로션을 덧발라주는 루틴을 만들었다. 덕분인지 수면제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헷갈린 경우는 한번도 없고 좀더 책을 읽다가 스르륵 잠이 든다. 그렇게 한국에서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평화롭고 무탈한 하루가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