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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Nov 16. 2023

31. 10월의 마지막은 할로윈 파티

얼결에 마법 학교 학생이 되었습니다?

 각양각색의 할로윈 마당들 :)


10월의 마지막 이벤트는 할로윈이었다. 한국에서는 할로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우리나라 명절도 안 챙기는데 남의 나라 명절까지 뭐, 하는 마음이었고 남들이 좋아라 즐기는 건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설과 추석 같은 명절이 생물학적 가족 간의 갈등과 다툼, 가부장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의식으로 외면당하는 데 반해 할로윈은 아무런 의무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 할로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분석 기사 비스무레한 걸 읽고는 그것 참 잘 됐네, 생각한 적이 있는 정도. 


미국에 와서도 별 관심이 없긴 마찬가지였는데 나도 모르게 조금씩 관심이 생겼다. 사람들이 집 마당을 정성스레 꾸미는 덕분이었다.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했을 때도(9월인데!) 벌써 할로윈 장식을 해둔 집들이 많아서 신기했는데 할로윈이 다가오니 장식은 더 많고 화려해졌다. 


덕분에 마당 구경하며 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소박하게 잭 오 랜턴 서너 개 가져다 놓은 집부터 공동묘지마냥 묘비를 죽 늘어놓은 집, 해골과 마녀들, 만화스러운 모양의 유령 풍선으로 마당을 가득 채운 집, 3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해골 모형(심지어 움직이는!)에 사람보다 큰 거미 인형을 나무 위에 올려놓은 집까지. 각자의 개성과 취향이 담뿍 드러나는 마당들이 재미있었고 이렇게까지 진심이라니,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할로윈이 되면 동네 산책이라도 해볼까 하던 차에 솔뫼의 친구 치읓상이 레드 뷰트 식물원Red Butte Garden의 할로윈 행사 티켓을 구해 같이 가겠느냐 물었다. 우리야 당연히 슈얼, 오케이, 와이 낫! 


치읓상이 가고 싶었다는 피자집에서 피자와 샐러드를 냠냠 맛있게 먹고는 식물원으로 향했다. 식물원 할로윈 행사의 명칭은 Bootanical at Red Butte Garden. 식물을 뜻하는 단어 botanical에 할로윈에 자주 쓰는 boo라는 단어를 합쳤다. 


boo는 겁을 주거나 놀래킬 때 쓰는 의성어로 우리말로 치면 워! 같은 느낌이다. 사람에 따라 웍! 헉! 헐! 허! 같은 베리에이션이 있는 것처럼 boo도 bo, boh! 같은 베리에이션이 있다. 네이밍 센스가 나쁘지 않은데, 생각하며 차에서 내리니 치읓상과 파트너는 토끼 모양 머리띠를 하고 있다. 


우왓, 너무 귀여워! 똑같은 모양인 줄 알았는데 파트너는 당나귀 귀였고 가슴팍에는 Bootanical Police라고 적은 종이 배지도 달고 있었다. 오, 주토피아! 진지한 줄만 알았던 두 사람의 깜찍한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방문객들도 나름의 코스튬을 하고 있었다. 닌자거북이, 스파이더맨, 국적은 알 수 없는 공주와 왕자님 등등…….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나와 솔뫼는 할로윈의 마음이라도 장착하기로 했다. 할로윈이 뭔지도 잘 모르지만 일단 즐겨보자는 마음! 


마법 학교에 입학(?)해 받은 학용품(?)들 :)


행사는 야외 식물원 구역에서 진행되었다. 입구에서 직원들이 매뉴얼과 깃털 달린 연필을 나눠주었다. 신입생을 위한 매뉴얼이었다. 오, 이곳은 레드 뷰트 식물원이 아니었다. 유타에서 가장 명망 있는 마법 학교 오클로어 아카데미였다. 학교 이름도 몰랐고 입학 원서도 낸 적 없지만 신입생이 된 나는 수업을 듣고 식물들의 마법적 특성을 발견해내야 했다. 짓궂은 마녀 머틀 스펄지Myrtle Spurge(독이 있는 잡초 이름이었다!)의 방해를 물리치고! 


이거 방탈출 게임이잖아? 근데 이제 장소가 식물원이고 야외인. 방탈출 게임을 좋아하는(딱 두 번 해봤고 두 번 다 탈출에 실패했지만) 나는 신이 났다. 거미줄과 마법사 모자, 유령, 박쥐, 늘어진 천과 꼬마전구 등으로 장식된 식물들을 지나면 중간중간 책자에 나와 있는 퀴즈들을 풀 수 있었고 퀴즈를 풀면 스탬프를 받는 방식인 것 같았다. 퀴즈를 풀고 있는 건 죄다 아이들이었지만 나도 참여하고 싶었다. 퀴즈를 풀고 스탬프를 꽝꽝, 받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춥고 어두웠다. 춥고 어두운 것까지 완벽한 마법 학교 설정이다, 감탄했지만 코스튬을 한 직원들도 이렇게까지 추울 줄은 몰랐는지 다들 파랗게 언 얼굴로 손을 비벼대고 있었다. 아쉽지만 문제들을 슥슥 지나쳐 식물과 장식 들만 빠르게 구경했다. 


슥슥 지나치긴 했지만 직원들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장식 하나, 등 하나 허투루 놓인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직원들 모두가 진심이었다. 


나는야 관상수 그룹!


제일 먼저 마법 지팡이를 골랐다. 마법 지팡이는 평범한 나뭇가지처럼 보였는데 충전소라는 곳에서 전등에 갖다 대자 색깔이 입혀졌다. 와, 이거 뭐야! 내가 너무 신기해하니까 치읓상이 얼른 대답했다. 코팅, 코팅! 빛을 받으면 색을 내는 물질을 바른 거라고. 알고 봐도 신기했고 환한 오렌지 빛깔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나의 부류랄지 종족이랄지가 정해졌다. 오렌지 빛깔의 나뭇가지를 집은 나는 관상수Acer! 관상수 그룹에 대한 해설을 재빨리 읽어보았다. 


‘관상수 그룹에 속하는 학생들은 창의적이고 호기심이 많으며 혁신적이다. 그들의 마스코트는 단풍나무, 대표 색은 오렌지와 금색. 단풍나무가 세상에 아름다움과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듯 관상수 학생들은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신비로운 창작물과 경이로움을 창조해낸다. 끝없는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오클로어의 발명가, 예술가가 될 것이다. 추천 직업: 마법 지팡이 제작자, 창의적인 예술가, 매력적인 공예품 제작자, 주문 발명가’


우와, 소오름! 딱 내가 되고 싶은 거잖아! 창의적인 예술가, 신비로운 창작물, 경이로움! 구절 하나하나가 다 나를 위한 말들이었다.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응원이라도 받은 듯 기운이 났다. 이런 거에 기운이 나는 나야말로 진심이군, 속으로 웃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다른 그룹에 관한 설명은 읽지 못했고 느네 집에 감나무 있지, 수준의 두루뭉술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에 불과하더라도 뭐 어떤가. 기운이 나고 기분이 좋아진 게 중요한 거지. 사람 기운 나고 기분 좋아지게 하는 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법의 약초를 나눠주는 곳에서는 피터팬이 주문을 외우며 마른 허브들을 주머니에 담아주었다. 그는 허브들을 담은 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려 마지막 주문까지 외운 후 진지한 얼굴로 내게 건네주었다. 재앙을 물리치고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허브 주머니를 나도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물약을 나눠주는 곳에서는 히피 마녀가 색색깔의 물병을 목에 걸어주었다. 색은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노란색, 솔뫼는 녹색을 골랐다. 그들 역시 평화를 비는 주문을 외워주었다. 



솔뫼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눈알 전구가 돋아난 풀숲 더미. 쓸데없이 리얼하게 만들어진 녹색 눈알에는 충혈된 빨간 선까지 그려져 있어서 나는 조금 징그러웠는데 솔뫼는 귀엽다고 했다. 솔뫼 취향도 특이한 건 알고 있었다만 이런 게 귀엽다니. 음, 눈깔사탕이다 생각하고 보면 그럴 듯도 하고?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땅 밑 유령들이 살고 있는 마을. 작고 흰 밀가루 반죽 같은 유령들이 할로윈을 맞아 모두 나와 있었다. 버섯 가로등이 세워져 있는 마당, 녹색 이끼가 앉은 지붕, 나무줄기로 엮은 벤치, 그 위에 앉은 밀가루 유령, 유령 머리 위로 떨어진 낙엽 같은 것들이 올망졸망 사랑스러웠다. 


솔방울과 다육 식물들을 이용해 만든 집도 멋있었다. 창문 주변으로 작은 돌을 촘촘하게 박아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외관에 변주를 주었고 지붕 위에 얹은 다육 식물은 할로윈에 걸맞는 장식이 되어 주었다. 



그 외에도 호수 위로 등장한 네스호의 괴물과 하늘에 둥둥 떠 있는 해파리들, 온갖 약물과 주물呪物들로 가득한 실험실, 색이 변하는 전구로 만든 터널 등등 빠르게 걸었는데도 공을 들여 꾸며놓은 공간은 꽤 넓었다. 이걸 어떻게 다 꾸몄을까. 직장인이었던 시절이 떠오르며 공간을 기획하고 꾸미느라 고생했을 직원들의 노고가 남일 같지 않았다. 둘러앉아 마법 학교 설정이며 마법 지팡이며 향초들을 세상 진지하게 논의하고 나뭇가지에다 도료 바르고 허브를 빻았을 직원들을 떠올리니 코끝이 찡해졌다. 보기에 별 거 아니라도 뭐 하나 만들려면 공이 엄청 든단 말이지. 공을 들여 만든 건 또 어찌 해도 티가 나고. 아아, 자꾸 옛날 직장 다니던 시절이…… 직장, 일하고 월급 받는 거 말곤 모든 게 싫었던 그곳. 


나만의 할로윈이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입구로 돌아오자 작은 DJ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DJ는 옛날 팝송, 요즘 팝송을 번갈아 틀었고 우리가 도착할 무렵에는 마침 빌리지 피플의 Y.M.C.A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렴구가 나오자 아이도 어른도 약속이나 한 듯 팔과 몸통을 이용해 Y, M, C, A 글자를 만들었다. 오, 이것은 만국 공통의 안무! 듬성듬성 서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토끼 머리띠를 한 치읓상과 솔뫼도 열심히 Y, M, C, A 모양을 만들었다. 디스코가 취향이 아닌 나는 손뼉만 짝짝 쳤지만 이 광경이 총체적으로다 마음에 들었다. 이런 거 너무 사랑스럽단 말이지. 아이를 위해 어른이 만든 공간에서 어른도 무렴없이 아이가 되어버리는 것. 각자 다른 시기일 테지만 한때 가졌던 어떤 시간들을 비눗방울처럼 두둥실 불어 올려 함께 노니는 것. 


마지막으로 기념품 가게를 한 바퀴 돌다가 핫도그가 된 아이를 마주쳤다. 솔뫼가 너 핫도그야? 물으니 예스, 라고 답한 아이는 내가 먹어도 되니? 묻자 귀신이라도 본 양 놀란 얼굴로 노, 라고 답했다. 내가 무서워 보였나. 자긴 핫도그면서. 


핫도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식물원을 나섰다. 아래로 반짝이는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나의 미국에서의 첫 번째 할로윈이자 인생 첫 할로윈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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