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이별 직전 – 우리가 함께 걷던 차가운 길
- mini prolog -
끝을 예감한 걸음에는 따뜻함보다 차가운 침묵이 먼저 찾아온다.
그날의 겨울 길 위에서 나는 마지막 온기를 붙잡았다.
금요일이었다.
나는 마치 중독된 사람처럼 또다시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지난주에도, 그 전주에도, 그리고 오늘도.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날의 후회가 나를 더 깊은 어둠으로 끌어내리고 있었기에 이제 나는 이별의 순간이 아닌, 그보다 앞선 시간으로 가고 싶었다.
아직 균열조차 시작되지 않은, 그녀가 웃을 수 있었던 마지막 겨울의 초입으로.
지난번과 다르게 서점의 문을 세차게 밀어냈다.
여전히 그곳은 낡은 종이 냄새와 함께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에일은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그의 눈빛엔 묘한 연민이 서려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지난 금요일의 그 겹침이 어렴풋하게 스쳤다.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까.
“지난주에는... 너무 늦었죠?”
내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에일은 고개를 숙여 낮게 말했다.
“이 모든 기억은 당신이 만든 감옥입니다. 그 안에서 당신이 어떤 마음을 먹는다 해도, 결말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괜찮아요. 이번엔, 마지막 미소를 지켜보고 싶을 뿐이에요.”
나는 스스로에게 모순된 말을 하고 있었다.
에일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책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별 직전, 우리가 함께 걷던 차가운 길]
마치 기억의 가장자리가 희미하게 닳아 있는 듯 표지는 지난주의 그것보다 한결 바래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표지를 쓸었다.
차가운 종이결 너머로, 오래된 온기가 느껴졌다.
“당신이 원한다면, 시간은 다시 열릴 겁니다. 하지만 잊지 마세요. 이건 ‘구원’이 아니라 그저 ‘반복’일 뿐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사라지기도 전에, 빛이 천천히 흔들렸다.
책의 모서리에 내 손끝이 닿자, 시간이 다시 나를 삼켰다.
눈을 뜨자, 창밖엔 겨울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단번에 그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빛은 희고 차가웠다. 공기는 눅눅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가엔 피곤함이 묻어 있었고, 입꼬리는 습관처럼 올라가 있었다.
그 웃음은 여전히 다정했지만, 어딘가 깨진 유리처럼 빛을 흩어 냈다.
“요즘은, 괜찮아요?”
“응. 괜찮아.”
짧은 대답. 그런데 그 말이 공기 속에 조금 흔들렸다.
그녀의 웃음은 다정했지만, 어딘가 닿지 않는 온도를 품고 있었다.
시간은 느리게, 그러나 잔혹하게 흘러갔다.
그 느린 속도가 이상하게 위로처럼 느껴졌다.
마치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건네는 온기 같았다.
“오늘은 뭔가 조금… 달라 보여요.”
“그래?”
“네. 무슨 힘든 일 있어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만 봤다.
그 눈빛엔 어딘가 ‘끝’에 닿아 있는 듯한 침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순간, 오늘 이 자리가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졌다.
나를 안심시키려 준비해 온 말들처럼 보였고, 나는 그 말들조차 사랑해 버리기로 했다.
그녀의 손끝이 잔을 스쳤다.
차가운 유리컵 표면엔 방금 전 온기와 맞닿았던 얇은 막이 희미하게 흩어졌다.
그녀는 그 위에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트를 그려냈다.
그러나 그 따뜻한 흔적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제… 그만해도 돼.”
그 말을 듣는 순간, 발끝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갔다.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헐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뭘, 뭘요?”
“나 기다리는 거 말이야.”
“….”
“이건 오래된 습관이잖아. 나한테도, 너한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앞의 그녀는 아직 내 기억 속 그대로였지만, 그 속에서 나는 이미 다른 시간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겨울의 바람이 차갑게 스쳤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머릿결을 타고 은빛으로 번졌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거리는 익숙했고, 우리의 그림자는 가로등 아래에서 하나로 포개졌다가 이내 다시 갈라졌다.
“이 길, 기억나?”
“기억나죠.”
그녀가 잠시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멀리,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리라는 걸.
“나 있잖아… 그때, 진짜로 행복했어.”
그 말은 마치 마지막 고백처럼 들렸다.
나는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코트 자락이 스쳤고, 그 감촉이 내 기억의 끝자락을 찢어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 속엔 겨울 하늘의 빛이 비쳤다.
희고, 차갑고, 그리고 끝의 색이었다.
“이제, 그만해도 돼.”
그녀의 말은 이번에도 명확했다.
그건 이별의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이 기억의 굴레에서 놓아주려는 마지막 온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빛과 공기가 일렁이고, 이내 모든 소리가 느려지더니 그녀의 모습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당신은 또다시 같은 길을 걷고 있네요.”
에일의 목소리였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히 내 곁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가 떠나지 않기를 바랐겠죠.
하지만 기억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바꾸려는 건 과거가 아니라, 결국 당신 자신이에요.”
그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조각들이 공기 중에 천천히 흩날렸다.
그녀의 모습이 그 사이로 서서히 희미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끝에 아직 그녀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따스함은 이내 사라졌고, 내 앞에는 텅 빈 거리와 흩날리는 눈만이 남았다.
순간 서점의 종소리가 들렸다.
빛이 다시 깜박였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책상 위엔 방금 닫힌 듯한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에일의 필체로 보이는 작은 쪽지가 있었다.
“당신이 되돌리려는 건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끝내지 못한 마음입니다.”
나는 조용히 그 쪽지를 접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마음은 이미 다음 금요일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