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설레게 했던, 멀리 사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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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던 중학교 1학년의 나는 보호자 없이 서울에 가면 큰일이 나는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어릴 적 사촌언니의 손을 잡고 갔던 63 빌딩이 서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던 것이다. 서울은 굉장히 넓고 크고 무섭고 마치 어른들만 살고 있어서 나 혼자 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시 내겐 방 한쪽을 그들의 사진으로 도배를 했을 만큼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밥 먹듯이 들락날락거리던 팬카페에서 곧 팬미팅이 열린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위치는 당연히 서울이었다. 엄마가 어린 나를 혼자 서울에 보내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 손을 잡고 갈 수도 없는 일. 결국 나는 엄마 몰래 팬미팅에 신청했다. 지역 팬클럽에서 대절한 버스로 다 같이 움직인다고 했기 때문에 그 차를 타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엄마의 눈을 피해 무사히 팬클럽 버스를 탔던 날, 버스 안의 분위기부터 팬미팅장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들을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설명할 수 있다. ‘오빠들’이 어느 노래를 불렀는지, 어떤 오빠가 어떤 멘트를 했는지까지, 당시 그 공간의 빛깔과 소리와 향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TV나 라디오, 잡지에서만 접하던 오빠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경험이었다. 오빠들을 볼 기회가 많을 서울에 사는 팬들이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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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의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내게도 여전히 서울은 몇 번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도시였다. 남들처럼 책상 앞에 ‘인 서울’이라 써붙이고 공부했지만 정작 서울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후덥지근하던 어느 주말. 나는 충동적으로 오전 자율학습에서 몰래 빠져나와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고 싶었던 대학교를 미리 구경하기 위해서’라는 건 땡땡이친 것을 걸렸을 때를 대비한 훌륭한 핑계였고, 사실 대학교가 아니라 좋아하는 선배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배가 어느 학교 어느 과에 다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작정 학교에 찾아간다고 해서 선배와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우선 가보기로 했다. 서울의 복잡한 길들을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중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길을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마침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선배와 만났다.(대학교 1학년이 여름방학 기간, 그것도 주말에 학교 도서관에 있었다니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선배다.)
그런데 막상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선배의 얼굴을 보니 이제까지의 패기가 무색하게도 어쩔 줄을 모르겠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 한 잔 마시고 갈래?”
“아니에요, 저 버스 시간 다됐어요!”
서울까지 갈 용기는 있었지만 좋아하는 선배와 대화할 용기는 없던 나는 그만 후다닥 도망을 치고 말았다. 저녁 무렵에서야 학교에 도착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가서 앉으며 책상 앞의 ‘인 서울’ 글씨를 고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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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보기 위해(!) 엄마 몰래 떠났던 두 번의 서울행. 이후 무사히 인 서울에 성공한 나는 최애 멤버와 실제로 만나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어른이 되었고, 우상과도 같았던 선배와는 술친구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오랜 서울 살이로 서울 지리에 빠삭한 어른이 된 것은 덤이다.
서울이 뭐야, 더 먼 곳까지도 더 이상 엄마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갈 수 있지만 엄마 몰래 서울 갈 궁리를 했던 그때가 가끔은 그립다. 서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채 설레며 모험을 떠나던 그때가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