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토끼 Oct 28. 2022

(남자 보러) 엄마 몰래 서울행

나를 설레게 했던, 멀리 사는 그들

*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던 중학교 1학년의 나는 보호자 없이 서울에 가면 큰일이 나는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어릴 적 사촌언니의 손을 잡고 갔던 63 빌딩이 서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던 것이다. 서울은 굉장히 넓고 크고 무섭고 마치 어른들만 살고 있어서 나 혼자 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시 내겐 방 한쪽을 그들의 사진으로 도배를 했을 만큼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밥 먹듯이 들락날락거리던 팬카페에서 곧 팬미팅이 열린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위치는 당연히 서울이었다. 엄마가 어린 나를 혼자 서울에 보내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 손을 잡고 갈 수도 없는 일. 결국 나는 엄마 몰래 팬미팅에 신청했다. 지역 팬클럽에서 대절한 버스로 다 같이 움직인다고 했기 때문에 그 차를 타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엄마의 눈을 피해 무사히 팬클럽 버스를 탔던 , 버스 안의 분위기부터 팬미팅장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들을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설명할  있다. ‘오빠들 어느 노래를 불렀는지, 어떤 오빠가 어떤 멘트를 했는지까지, 당시  공간의 빛깔과 소리와 향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TV 라디오, 잡지에서만 접하던 오빠들을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경험이었다. 오빠들을  기회가 많을 서울에 사는 팬들이 부러워졌다.



*

5년의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내게도 여전히 서울은 몇 번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도시였다. 남들처럼 책상 앞에 ‘인 서울’이라 써붙이고 공부했지만 정작 서울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후덥지근하던 어느 주말. 나는 충동적으로 오전 자율학습에서 몰래 빠져나와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고 싶었던 대학교를 미리 구경하기 위해서’라는 건 땡땡이친 것을 걸렸을 때를 대비한 훌륭한 핑계였고, 사실 대학교가 아니라 좋아하는 선배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배가 어느 학교 어느 과에 다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작정 학교에 찾아간다고 해서 선배와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우선 가보기로 했다. 서울의 복잡한 길들을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중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길을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마침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선배와 만났다.(대학교 1학년이 여름방학 기간, 그것도 주말에 학교 도서관에 있었다니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선배다.)


그런데 막상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선배의 얼굴을 보니 이제까지의 패기가 무색하게도 어쩔 줄을 모르겠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 한 잔 마시고 갈래?”

“아니에요, 저 버스 시간 다됐어요!”

서울까지 갈 용기는 있었지만 좋아하는 선배와 대화할 용기는 없던 나는 그만 후다닥 도망을 치고 말았다. 저녁 무렵에서야 학교에 도착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가서 앉으며 책상 앞의 ‘인 서울’ 글씨를 고쳐 썼다.



*

남자를 보기 위해(!) 엄마 몰래 떠났던 두 번의 서울행. 이후 무사히 인 서울에 성공한 나는 최애 멤버와 실제로 만나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어른이 되었고, 우상과도 같았던 선배와는 술친구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오랜 서울 살이로 서울 지리에 빠삭한 어른이 된 것은 덤이다.


서울이 뭐야, 더 먼 곳까지도 더 이상 엄마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갈 수 있지만 엄마 몰래 서울 갈 궁리를 했던 그때가 가끔은 그립다. 서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채 설레며 모험을 떠나던 그때가 참 좋았다.

이전 03화 이번 생에 오디션은 처음이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