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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토끼 Mar 15. 2021

이번 생에 오디션은 처음이라

흑역사도 곧 추억이 될 것이니

이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소주 한 잔을 들이켜고 시작해야 한다. 너무 민망해서 그 누구에게도 차마 하지 못한 이야기, 우리 엄마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르는 이야기다.


동네 만화책방에 자주 들르던 중학생 때의 일이다. 만화책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잡지가 구비되어 있던 그곳에서 나는 패션 잡지를 종종 읽곤 했다. 잡지에 등장하는 옷과 가방은 나의 용돈으로는 택도 없는 가격이었고, 연애 상담이나 맛집 정보가 담겨있는 기사 역시 나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낱 중학생이 이런 어른용(?) 잡지를 읽어도 되는 것일까.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부끄러워서 조심스럽게 읽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것이 잡지 모델 모집 공고였다.


공고를 보자 괜히 두근두근 마음이 설렜다. 지원할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지? 지원할 것도 아니면서? 지원…? 그때까지 잡지사에 보내 본 것이라곤 경품 응모 엽서가 다였다. 심지어 운이 좋아 여러 번 당첨되기도 했었다. 고민 끝에 결국, 이번에도 나의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응모 방법은 간단했다. 얼굴과 전신, 사진 두 장과 자기소개서를 우편으로 보내면 되었다. 마침 졸업앨범 사진을 찍은 지라 얼굴 사진은 있었는데 전신사진이 문제였다. 지금도 없는 프로필 사진이 열여섯 살의 내게 있을 리 없었다.


소풍날 반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던 이 생각났다. 곧장 앨범을 열어 나의 전신이 찍힌 사진을 하나 골라냈다. 친구와 나란히 서서 양 팔과 다리 한쪽을 앞으로 쭉 뻗고 “예-!”하고 외치고 있는 사진이었다. 단정한 교복에 도수 높은 안경, 반 묶음 머리, 흰 양말에 검정 메리 제인 구두. 신난 표정과 포즈만 빼면 전형적인 모범생의 모습이었다. 모델 지원 사진에 이런 사진을 써도 되나 잠시 고민했지만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거짓말처럼 서류 합격 소식을 받았다. 내가 지원을 하긴 했지만 막상 면접을 보러 오라는 말을 들으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당시의 나는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말랐지만, 모델이 될 만큼 얼굴이 예쁜 것도 비율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패션센스가 좋다거나 끼가 많지도 않았다. 이런 내가 합격을 했다고?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것, 가보자고 결심했다. "네가~?"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으니 차마 제일 친한 친구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채, 몰래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몇 번 가본 적 없는 서울에 혼자서 가는 일부터가 큰 모험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길을 물어 간신히 잡지사에 도착했다.


잡지사 앞에는 긴 줄이 있었다. 순서대로 야외에서 사진 촬영을 한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오디션을 보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멍해 있다가 등 떠밀리듯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줄을 선 인형 같이 예쁜 사람들을 보며, 여기는 내가 올 곳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오디션장에 들어갔다. 내가 준비해 간 의상은 빨간색 민소매 티셔츠에 청치마였다. 열여섯 모범생에게는 민소매 티셔츠가 익숙지 않아 자꾸 내려오는 속옷 끈을 누가 볼세라 연신 숨겼다.


대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심사위원 앞에 섰다. 어찌어찌 자기소개를 마쳤더니 장기자랑을 요청받았다. 준비한 것이 없어 잠시 당황했지만, 이대로 집에 갈 수도 없어 ‘노래 한 곡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음악시간 가창 시험에서도 덜덜 떨던 내가 낸 아주 큰 용기였다.


기억해 지금 순간부터 어제 나란 잃고 없는 거야

오직 널 믿고 사랑해 줄 내가 있어

난 다시 태어나는 거야 저 하늘이 허락한 운명에…

(※혹시 오해가 있을까 덧붙이자면 당시 나의 가창 시험 성적은 C였다.)


정말이지 어제의 나는 없고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오디션장에 들어선 순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노래를 부른 순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니 내게 정말 큰 사건이긴 했나 보다. 


다음 달 잡지에는 오디션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입상자 소개를 보니 눈에 익은 얼굴이 하나 있었는데, 야외 촬영 때 유난히 눈에 띄길래 기억하고 있던 지원자였다. 그 얼굴은 나중에 TV에까지 나오게 되었고, 나는 그런 분과 같은 오디션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게 다 어린 날의 무모한 모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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