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

20240101

by 채리 김

이치코상에게


나는 이제 곧 떠날 때가 되었어, 눈이 오지 않는 뉴욕을. 이소라 노래를 듣고 있어. 매일 테크노만 들을 수는 없는 게 삶인가 봐. 웃기지. 그리움이 나를 무너뜨릴까 봐 매일 걱정해. 그래서 내가 영영 그리워하게 될 것에 대해 목록을 써보기로 했어. 이 목록에 있는 것 이외에는 절대 그리워하지 않기로 해. 나는 아직 너무 어려서 그리움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굳게 믿는 그런 치기를 갖고 있거든.


매디슨 스퀘어 파크와 유니온 스퀘어 파크의 혼돈

파크 애비뉴 서쪽 아파트를 나서면 내 기준 오른쪽으로는 유니언 스퀘어 파크가, 왼쪽으로는 매디슨 스퀘어 파크가 있어. 이걸 꾸준히도 반년 넘게 여전히 헷갈려해. 유니언 쪽으로는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가, 너의 쇼룸이, 내가 좋아하는 구제 샵들이 모여 있어. 매디슨 쪽으로는 날씨 좋은 날 테이크아웃한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는 철제 테이블들이, 할리우드 영화 음악을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남자가 상주하는 분수대가 있어. 그 기로를 매일 헷갈려 계획에 없던 뉴욕 구경을 할 수 있게 해 준 내 착오를 그리워할 거야.


언니의 압박 붕대

일본 음식점에서 서버 일을 하는 언니가 마감까지 일을 하고 돌아올 때가 있어. 언니가 아파트를 올라오는 계단 소리가 들려. 지친 언니는 들어와서 환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해. 그리고 제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어. 내가 언니 옆에 앉으면 언니는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했던 압박붕대를 벗고 있어. 조금 긴 붕대 때문에 언니의 종아리 맨 위 끝에는 짓눌린 자국이 있어. 언니는 내게 묻지. “밥 먹었어?” 그런 힘겨운 자국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언니가 잠들기 직전까지 라디오 방송처럼 내 하루 이야기를 떠드는 거야.


브루클린 고양이들

친구는 봄철 내내 고양이를 입양하고 싶어 했어. 여름이 시작되기 직전, 친구가 데려온 아기 고양이를 기억해.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데려온 또 다른 성인 고양이도 보러 갔어. 친구는 보호소에서 데려온 이 아이가 유기묘인지, 누군가 잃어버린 실종묘인지 내내 신경 써.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되어 오랜만에 그 고양이들을 보러 갔을 때, 아기 고양이는 지독한 사춘기를 겪으며 흥분해 있었고, 의젓한 어른 고양이만 나를 반겨주더라고.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재채기를 해가며 아이들에게 키스해. 내가 처음으로 애정한 고양이들이야.


밤에는 내리는 블라인드, 늦은 아침 다시 올리는.

맨해튼 파크 애비뉴 한복판에 살면 10층에서도 6 트레인이 지나가는 지하의 소음이 들리고, 조망권이 보장되지 않는 건너편 스튜디오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에 고요한 밤이란 주어지지 않아. 그래서 우린 자기 전에 머리맡의 통창 전체를 가리는 크고 무거운 블라인드를 내려. 그 행위는 다음 날 아침 햇빛을 차단해 아주 느지막이 일어나는 기상으로 이어지지. 부스럭거리는 잠에서 깨어나 드디어 뉴욕의 아침을 마주할 준비가 되면 블라인드를 올려. 늦은 오전 맨해튼의 광경은, 그리고 그 광경을 내리쬐는 동쪽 너머 햇살은 참 예뻐.


해장국 대신 계란과 베이컨, 블루베리 젤리를 바른 토스트

브루클린 레이브 광란의 밤을 보내고 꾸역꾸역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해. 해장이 필요해 눈을 뜨면, 집에는 라면 한 봉지조차 남지 않았고, 함께 눈을 뜬 미국인 친구는 김치찌개를 시켜 먹고 싶진 않아해. 아주 뜨거운 블랙커피가 필요하다네. 우리는 15분 거리의 다이너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어가. 숙취가 너무 심해 가는 내내 한마디도 나누지 않아. 다이너에 들어가 후덥지근한 계란 요리 냄새를 맡으며 자리에 앉아. 나는 시판 소스로 만드는 것이 분명한 토마토스파게티를, 친구는 오버이지 계란 두 개에 베이컨을 시켜. 웨이터가 수시로 채워주는 커피잔에 크림과 설탕을 입맛대로 넣고 우리는 마침내 해장해. 나는 그 커피에 속이 풀릴 때마다 시원한 우거지 해장국을 떠올려. 그렇지만 나는 네가 시킨 음식에 딸려 나오는 토스트를 좋아해. 귀엽게 생긴 블루베리 젤리를 발라 크러스트만 남겨놓고 빵 속을 씹어 먹지. 토스트 크러스트 모서리는 내 입가를 둘러 감싸.


찾아내고 파괴하기

세인트 마크스 거리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제 샵이 하나 있어. 서치앤디스트로이. 들어가면 가슴이 세 개 달린 여자의 사진, 머리가 잘린 피투성이 인간과 성행위 하는 털보 사진, 곳곳에 놓인 신발 켤레에 꽂힌 딜도, 페니스들. 밧줄에 묶여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는 시체 마네킹. 트림만 계속하는 헤비메탈 노래. 내 손바닥만 한 구멍을 뚫어 원형의 귀걸이를 한 가게 점원의 귓불,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 전체에 새겨진 해골 골격 문신. 말도 안 되게 역겨운 이곳을 나는 사랑해. 일단 보석 같은 옷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고, 대도시 한복판에 이렇게나 컨셉추얼 한 가게가 있다는 건, 내가 이 도시에 내내 살고 싶은 이유일 거야. 이곳에 갈 때마다 나는 200달러 치 쇼핑을 하고 나오지. 이곳을 소개해 준 그 애와 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팬이라, 항상 가게를 나서기 직전, 카운터 아래 전시된 비비안 웨스트우드 하트 목걸이를 마지막 잎새 쳐다보듯 확인하고 나와. 아직 누가 먼저 채 가진 않았겠지? 돈 벌어서 다시 돌아올게.


공짜 염색약

여름부터 머리를 염색하기 시작했어. 매일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고 싶은데, 옷을 더 살 돈이 부족했거든. 회사에서 반영구 염색약을 가져와 머리색을 바꿨어. 그 주 파티의 콘셉트에 따라,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내 기분에 따라 색깔을 골랐지. 선명한 자주색은 다음 주면 색이 빠져 빈티지한 분홍색이 되었고, 횟빛 푸른색은 비가 오면 파란 눈물이 되고, 그럼 짙은 보라색으로 염색하고 굳센 표정을 하지. 내년에도 이렇게 부지런히 내 개성을 바꿀 수 있을까, 궁금해져.


돌아가는 큐브 구조물

애스터 플레이스 광장에는 커다란 검은색 금속 큐브가 설치되어 있어. 이스트 빌리지 바로 향하는 이미 술에 취한 한밤중, 우린 그곳을 지날 때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큐브를 돌려. 육중하고 무거운 큐브를 양쪽에서 두 명이 뱅글뱅글 돌리며 즐거워하지. 낮에는 관광객들이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 아래서 떠받는 포즈를 하고 사진을 찍듯, 그 큐브에 손을 대고 사진을 찍는데, 생각해 보면 우린 그 앞에서 사진을 찍은 적이 없어. 그냥 주사 같은 거였어. 특별함을 시답잖은 술주정으로 대꾸하는 우리가 마음에 들어.


부시윅 머틀 애비뉴, 때때로 맛이 가는 구글맵, 매일 40분씩 타는 롱아일랜드 기차, 봄에 머물던 일출이 보이는 차가운 아파트, 퇴근 후 맥주를 사던 델리, 델리 사장님, 디제잉을 함께 한 나의 친구들, 아무리 바빠도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노상 서점, 올해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을 썼던 나의 빨래방, 나무 계단 냄새, 매번 다르던 커피 맛, 셀 수 없이 마신 스텔라 맥주, 그 모든 것. 내 동네. 나의 세상.


나는 이곳을 꿈꿨던 만큼 온전히 가지기 위해 부단히 도 노력했고, 최선을 다했고, 나 자신을 부숴가며 열심히 사랑했어. 내가 아니라 내 세상을 쓰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돌려가며 길을 걸었고, 흑백이 아닌 컬러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눈이 부셔도 수시로 선글라스를 벗었어. 오히려 깨어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다는 자기 계발적 다짐으로 불면증과 대치했고, 부족한 수면을 채우기 위해 지하철에서 쪽잠 자는 일도 지양했어. 뉴욕 지하철에서는 아주 재밌는 장면들이 랜덤으로 발생하니까.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길을 걷다가도, 도시의 소음을 기억하기 위해 노래를 껐고. 매주 돌아오는 주말, 빨래방 가기를 미루고, 차라리 속옷을 손빨래해 가며 파티에 가서 사람들을 만났어. 출장을 다녀와서도 집에서 짐을 풀고 뜨거운 물에 목욕하기 대신 1차는 맨해튼, 2차는 브루클린 다음 출장을 이어 나갔어. 내 방에서 글을 쓰기보단, 친구들과 프리게임에 가는 것을 선택하며 내 안의 답답함을 마주하고 절필적 죄책감을 외면했으며. 할 말이 있다던 동생과의 연락을 4주 넘게 미뤄가며 카카오톡 알람을 껐어.


잃은 만큼 가질 수 있다고 믿었어. 나는 너무 작아서, 언젠가부터 내가 커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는 걸 포기해서, 내 작은 몸 안에 새로운 것을 가져내고 싶다면, 내가 이미 가진 것들을 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새로운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쫓아냈고, 새로운 추억들을 간직하기 위해 내가 가지고 있던 소중한 추억들을 폐기 처분했어. 누구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버렸다고. 근데 이치코상, 진짜 우스운 게 뭔지 알아. 인간은 아이폰 용량 128기가가 아니더라. 새로운 사진을 찍기 위해 옛날 사진을 삭제해야 하는 그런 메커니즘이 아니더라고. 어쩌면 차라리 무제한 아이 클라우드를 갖고 있는 게 우리인 것 같아. 지금 내 아이폰에 새로 담을 사진들을 위해 옛날 사진은 아이 클라우드 계정에 옮겨두면 되는 게 방식이더라. 이걸 깨닫고 뒤늦게 휴지통에서 내가 버린 사진들을 복구시키려 허겁지겁 버둥댔지만, 이미 30일이 지난 지 오래라 어떤 것들은 영영 잃고 말았어. 그렇지만 알잖아 이치코상. 앞으로 또 괜찮을 거라는 거. 잃고 가지고 다시 잃어도 또 가져낼 거라는 거.


그래도 난 깨달았어. 나는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걸, 세계를 글로 쓰고 싶은 꿈을 가졌다는 걸. 내 깨달음은 곧 다짐이 되어 나를 구성해. 이치코상, 너의 다짐은 뭐야? 우리 올 한 해 깨달음을 공유했다고 생각해. 내가 너에게 쓰는 편지가 없었다면, 난 사랑할 수 없었을 거구, 글을 쓸 수 없었을 거야. 고마워. 이치코상. 우리 서로를 응원하자. 마침내 사랑하자.


새해 복 많이 받아. 보고 싶을 거야.


P.S. 한국은 1월 1일이지? 이치코상의 2024년 시작에 나의 2023년 끝을 써서 보내네. 올해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로 추신을 채울게. 아주 지저분하고 그렇지만 사랑스럽던 이스트 빌리지 바의 화장실에 적혀있던 낙서, 윈스턴 처칠의 명언.


이건 끝도 아니고, 심지어 끝의 시작도 아니야. 어쩌면 시작의 끝일뿐이야.


P.S.S 2023년 내 플레이리스트 중 몇 곡도 덧붙일래. 연말연시 분위기에 맞는 노래들로…


Beach House - Space Song

Amerie - 1 Thing

Crystal Castles - Vanished

The Smashing Pumpkins - 1979

Blue Boy - Remember Me (Original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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