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 자길 잘했다
7시 25분이었을까. 황급히 집에서 나섰다.
7시 23분 지하철을 타야 예매해 둔 8시 23분 서대구행 열차에 오를 수 있는데 큰일이었다.
공복에 허파가 터지도록 뛰었는데 결국 그다음 지하철도 타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서대구행 다음 열차 티켓을 결제했다.
오늘은 대구의 한 대학교 실험실의 강의 영상 촬영이 있는 날.
나는 해당 과정의 구성작가로 현장에 참여한다.
다행히 오전 콜타임은 현장 세팅을 위한 약속으로, 내가 한 시간 늦더라도 촬영에는 지장이 없다. (그래도 모두 약속된 시간에 가야 마음이 편한데.)
서울에 15년 이상 살았지만 기차를 타고 어딜 가는 건 대부분 호남 지방이었으니 용산역이나 수서역을 주로 이용했다.
대구에 가느라 오게 된 서울역은 내게 익숙한 역사의 모습과는 조금 달라서, 괜히 새로웠다.
여름에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갔을 때 느낀 그 낯선 역사의 느낌과 어딘가 모르게 겹쳐서, 서울에 놀러 온 외국인의 기분도 살짝 체험해 볼 수 있었다.
또 어제는 촬영장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은 굶고 잤기 때문에 대단히 공복인데, 시간이 많으니 편하게 식사해도 될 것 같아 식당에 들렀다.
늦게 눈을 떠 당황스럽던 아침과는 대조되는 지금 이 시간. 잠시나마 여유가 필요한 나에게는 감사한 지각이다. 늦잠 자길 잘했다고 생각되는 순간도 있네.
어제는 일산에서 촬영을 마치고 집에 와 쓰러지듯 잠들었다.
전날 종일 육아를 한 데다 새벽에는 대본 작업을 하느라 한숨도 못 자고 촬영장에 다녀와서였다.
요즘 대본 작업이 밀린 데다 촬영도 연달아 잡혀 있어서, 그것을 소화하려면 잠을 줄이는 게 답이라... 너무 고되지만 별 수 없다.
아빠 장례와 삼우제를 마치고 다시 (굉장히) 바쁜 일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누군가는 차라리 바쁜 게 나을 거라 얘기한다.
그래,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도대체가 적당히 바빠야지. (체념…)
8월부터 인간 답지 않은 삶을 살고 있기에, 프로젝트가 대충 정리될 연말이 너무나 간절히 기다려진다.
사람들과 있으면 내 슬픔에 집중할 여유가 없다. 그건 엄마가 떠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3의 나는 당시 이중생활을 했었다.
—학교에선 깔깔 웃으며 잘 지내고, 집에 와 현관문을 열 때부터 참았던 눈물을 왈칵 흘리던 나날들의 반복.
그걸 천 번 이상 하고 나니, 언젠가부터는 울지 않고 웃으며 엄마를 떠올릴 수 있게 됐고, 가족들과 엄마 이야기도 편하게 할 수 있게 됐었다.—
어제 촬영장에서는 촬영에 몰입하고, 잠을 한숨도 못 자서 중간중간 꾸벅꾸벅 졸다가, 스태프분들의 실없는 소리에 깔깔 웃느라 그런대로 또 밝게 지냈다.
게다가 예상보다 촬영이 일찍 끝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올 수 있었다. 택시가 잡히면 택시에서, 지하철을 타게 되면 지하철에서라도 좀 졸까 했는데 막상 잠이 안 왔다.
혼자 있게 되는 그 순간엔 어김없이 아빠의 얼굴이 떠오른다. 매 순간 생각하지만 일상을 보내느라 구석에 잠시 넣어둔 그 얼굴이, 혼자 있게 되면 와르르 쏟아진다.
그러면서 눈물도 함께 떨어진다.
지하철에서 내내 눈물을 삼켜내야 했다. 모자를 쓰길 잘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10분의 시간 동안에는 맘 편히 울었다. 정말이지 모자를 챙기길 잘했지…
걷다 보니 저 멀리 하원한 아이가 작게 보였다. 시간이 맞아 아빠랑 밖에서 기다렸나 보다.
아이 앞에선 울고 싶지 않아서, 얼른 눈물을 훔쳤다.
평소 같으면 남편에게 “아빠 생각이 나서 속상했어.” 말했을 테지만 어제는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지 않다. 슬프게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아빠와 이별하는 중이다.
여동생은, 지금도 아빠는 우리 곁에 있다고, 아빠랑 함께한다고 생각하면 덜 슬퍼질 거라고 얘기하지만… 사람마다 애도의 방법은 다른 건지, 난 그게 되지 않는다.
일단 나는 오롯이 느낀다. 엄마가 가셨을 때도, 기니피그 된장이와 춘장이가 떠났을 때도, 그리고 마주하고 싶지 않던, 언제까지고 미루도 싶던 아빠와의 이별을 갑작스럽게 경험하게 된 지금도.
그 존재의 크기만큼 이 기간은 길어진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크다는 말처럼, 나는 당분간 이러한 시간을 오롯이 감내해야 할 거다.
그리고 “아빠와 늘 함께 있는 거야”라는 믿음은 그 이후에 가슴 깊이 뿌리내릴 거다. 평생 갈 그 믿음은, 나에게는 지금의 이후 단계이다.
엄마와의 이별은 내 마음 가는 대로였다. 사실 지금도 이별하고 있는 거라서, 어떤 이별이었다 정의 내리기도 이르지만.
평생 겪을 두 번의 큰일을 이미 겪어버린 입장에서, 엄마의 죽음은 실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둠 속에 푹 빠졌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오를 수 있게 해 준 것은 ‘긍정의 마음’이었다.
엄마가 안 계셔서 형언할 수 없이 슬펐지만, 그래도 내가 웃을 수 있는 이유, 그럼에도 웃어야 하는 이유들 말이다. (무엇보다 아빠가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었으니 가능했다.)
그런데 아빠와의 이별은, 혼자만의 생각과 방법으론 극복이 어려울 것 같다. 일단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깊게 알고 싶다.
죽음 뒤의 희망을 봤다면, 이제는 죽음 그 자체에 집중해야 이 어두운 터널 속에서 빛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래서 며칠 사이 몇 권의 책을 샀다. 지금은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에 읽을 여유가 없지만, 내가 손꼽아 기다리는 연말이 되면 조금은 여유를 두고 읽어 내려갈 수 있겠지.
나를 지배하던 단단한 내 철학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다. 나는 다시 그 돌들을 주워 하나하나 쌓겠지. 아빠가 만들어 낼 새로운 내 모습을,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줄 거다. 나는 언제나 가장 믿음직스러운 내편이니까.
아빠 보고 싶어요. 두 번은 없을 딸 바보 우리 아빠.
오늘도 나는 우리 아빠 마상영의, 우리 엄마 윤미경의 딸이라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있어 너무나 다행이다. 우리는 90세까지 오래오래 살자고, 손주들 보며 용돈도 주고 짓궂은 장난도 치는 그런 건강한 할머니가 되자고 약속했다.
평화로운 화요일 아침이네요. 모두 무탈한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덤으로 그 안에서 커다란 즐거움과 자그마한 행복도 함께 발견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