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조금 그리워진 대학교 대형 교양 강의 시간.
나는 일찍 도착해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나의 먼 곳부터 텅 비었던 자리가 하나, 둘 차기 시작했다. 이내 다양한 학과에서 모인 다양한 개성을 가진 다양한 나이대의 학생들이 거대한 강당을 가득 메웠다. (시각은 아마 오후 한 시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점심을 먹고 난 후의 나른함, 강의 시작 전의 그 어수선함과 북적임, 그리고 강의 시작 후의 정적. 그 설렘과 긴장과 안일함의 어느 틈에서 나는 졸기 시작했다. 그런 졸음은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나의 졸음은 언제나 그런 복잡한 고요 속에서 슬며시 찾아왔으니까.
백발의 노교수는 준비한 강의 내용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그의 언어에는 높낮이도, 강렬함이나 연약함도, 열정도 나태함도 없었다. 그의 강의는 그저 시간을 따라, 옅고 깊은 졸음과 딴짓들의 향연 사이를 흐르고 지나갔다. 그는 틈틈이 간단한 질문을 던졌으나 명확한 대상 없는 질문은 허공으로 흩어져버렸고,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강의를 이어갔다. 그는 답을 알고 있었으니 질문했고, 나머지는 답을 알고 있었으나 침묵했다. 그런 반복은 조금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좀처럼 나의 졸음은 달아나지 않았다.
이제 시각은 세 시께. 노교수의 강의는 마침내 나름의 절정으로 치닫고(비록 강의와 함께 절정에 다다른 사람은 없었을 것이나), 길었던 나의 졸음도 끝이 보였다. 강의를 하는 이와 강의를 듣는 이, 깨어있는 이와 잠든 이 모두가 기다렸던 강의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두 시간의 억압을 끝내고 마침내 분출될 어수선한 젊음의 혈기 속에서, 혹은 모든 이가 흩어져 무엇도 남지 않게 될 강의의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교수는 나지막하게 전언을 읊조린다.
"마지막엔 결국 사랑이 옵니다."
마지막에서 마지막을 외치는 묵직한 언어. 이 말은 위태롭고 권태롭던 강당을 빠르게 채워나갔다. 언어의 끝을 잡고 다시 적막이 퍼졌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완전히 깨어나고 말았다. 일순간 모두가 침묵했으나 모두가 깨어났으리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오늘까지도 문득문득 자꾸 떠오른다. 마지막 순간에 일렁이던 동요와 격렬함을 멈추게 한 그 말이, 모두가 따뜻하게 얼어붙던 그 고요가. 그 복잡한 고요 속에 나는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마지막’에 다시 ‘사랑’을 외쳤기에 내게서 (혹은 함께 정적했던 사람들 속에서) 그 강의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마지막에는 올 것이라 믿는 사랑, 그래서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하는 사랑, 그 기다림 끝에 결국 찾아와주는 사랑, 그런 게 바로 사랑. 그렇게 담담하고도 극적인 사랑의 예찬이라니. 잠결에 들어 맥락도 모르고, 누가 말했는지 출처도 모를 근본 없는 문장이지만, 그렇기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조금 충격적인 그 말을, 나는 반만 믿어보련다. 마지막에 결국 사랑이 오든, 끝끝내 사랑이 가든, 어쨌든 우린 평생 사랑이란 말을 뱉고 삼키면서 사니까. 그래야 한다고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