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는 다른 시대를 오해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시대는
자기만의 추잡한 방식으로
다른 모든 시대를 오해한다.
- 비트겐슈타인
위 문장에서 ‘시대’를 ‘사람’으로 바꿔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오해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바보 같은 방식으로 즉,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다른 모든 사람을 오해한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각자의 언어로 쌓은 저마다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요. 내가 본 그의 모습은 ‘내가 본 그의 모습’이지 ‘그의 모습’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인정할 때, 이해의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세상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진실의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일부만을 본다는 진실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일부만을 본다는 진실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의 진실된 모습을 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자신이 보는 세상이 전부라고 착각하고, 자신의 세상을 사람들에게 강요합니다.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폭력적입니다. 세상과 자꾸 다투게 됩니다.
나의 세상은 내 언어의 거울입니다. 세상은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 맞습니다. 나는 나의 세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고통을 볼지,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을 볼지, 그것은 나의 선택입니다.
고통에 시선을 두면 세상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고, 고통을 극복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두면 세상은 희망으로 빛납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본다면 세상은 거칠고 험난한 곳이 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본다면 세상은 밝고 살만한 곳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려 하지만 장점을 보는 것이 어렵다면,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데 어떻게, 감히,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용감해도 지나치게 용감합니다.
어느 노인이 길을 가다가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청년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물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물을 뿌리는 청년의 행동이 신기해 한참을 지켜보다가 물었습니다.
“자네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청년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습니다.
“보면 모르십니까? 하늘을 향해 물을 뿌리고 있습니다.”
“그래 보이네. 왜 하늘을 향해 물을 뿌리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 물은 걸세.”
“저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물을 뿌려서 좀 식히려고요.”
“저런, 그런데 물이 태양까지 갈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어림도 없었죠. 겨우 저 나무 중간까지밖에 안 올라갔어요. 하지만 꾸준히 하다 보니 이제 나무를 훌쩍 넘길 수가 있게 됐다니까요. 조금만 더 하면 곧 태양까지 닿을 겁니다.”
“하하, 대단한 젊은이군. 태양이 뜨거우면 모자를 쓰든지, 차라리 저 나무 그늘 아래로 가 있는 건 어떻겠나?”
“그런다고 태양의 뜨거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태양만 식히면 모든 문제가 싹 사라질 거예요. 힘들어도 해야죠. 죄송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해봐야겠어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노인은 안타까운 눈으로 청년을 잠시 바라본 뒤 다시 가던 길을 갔습니다. 햇빛을 가리는 챙 넓은 모자를 쓰고요.
저 젊은이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저 젊은이의 행동과 같습니다. 아무리 물을 뿌려도 닿지 않는 태양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모자를 쓰면 태양이 견딜 만해지듯 내가 바뀌면 상대가 변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계절에 따라 태양이 변하듯 상대는 자신의 흐름에 따라 변해갈 뿐입니다.
‘중요한 건 타인 그 자체가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태도’입니다. 타인을 바꾸려는 자는 어리석고 자신을 바꾸려는 자는 지혜롭습니다. 자신을 바꾸려는 자가 진실로 용기 있는 자입니다. 자신을 바꾸는 길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를 바꾸며 시작’됩니다. 그 연습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자신을 향해 사랑과 이해의 언어를 보낼 때, 우리는 용기 내어 변화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지금 이대로 충분합니다.”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살아있어 감사합니다.”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듯, 처음 외국어를 배우듯, 반복해서 쓰고 외우고 말합니다. 그것이 기도이든, 긍정 확언이든, 책읽기든, 영상 보기든, 좋은 사람 만나기이든, 꾸준히 내게 사랑과 이해의 언어를 건네봅니다. 마침내 어린아이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나오듯, 절망의 상황에서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말이 툭하고 피어날 때까지.
나는 보고자 하는 것을 보고, 하고자 하는 말을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나에게 사랑과 이해의 언어를 쓰기 시작할 때, 나를 둘러싼 세상은 긍정과 희망으로 빛나게 됩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다. 사랑에서 나온 것만 눈에 담고, 이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안타깝게 우리들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저마다의 세상에서
각자따로 살고있어
다른사람 참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네
이사실을 인정하면
이해의문 열리지만
자기가본 세상만이
진실이라 고집하면
어리석은 사람되고
세상과도 다툰다네
내가사는 이세상은
내언어의 거울이라
내언어를 바꾼다면
내세상도 달라지네
고통보면 절망하고
극복보면 희망갖네
단점보면 험한세상
장점보면 밝은세상
장점보고 싶지마는
장점보기 어려다면
타인잘못 아니라네
내태도를 바꿔야해
다른사람 바꾸려는
그행동은 부질없소
내태도를 바꾸는게
변화의길 시작이라
어린아이 말배우듯
외국어를 첨배우듯
쓰고외고 말하는걸
꾸준하게 반복하세
자신향해 사랑이해
따뜻한말 건네보세
자신에게 따뜻하면
타인에겐 절로따뜻
내가나를 사랑하면
세상도날 사랑하네
사랑만을 눈에담고
이해만을 품으면은
어떤상황 오더라도
내세상은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