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마라.
단지 보라.
비트겐슈타인
대학교 때 시를 쓰던 선배에게 풀꽃과 나무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선배에게 배우기 전에는 나무는 그냥 나무, 풀은 그냥 풀, 꽃은 그냥 꽃이었습니다.
이름을 알고 나니 나를 둘러싼 세상이 넓어지고 풍성해졌습니다.
저건 꽃마리, 아이고 작기도 해라.
저건 제비꽃,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꽃이라고?
저건 달개비, 닭장 주변에 잘 자라서 닭의장풀이라고도 한다고 했지.
저건 라일락, 꽃은 향기로운데 잎은 얼마나 쓴 지...
씀바귀, 쥐똥나무, 서어나무, 회양목....
그냥 풀, 꽃, 나무였던 길들이 다채로운 공간으로 확 바뀌었습니다. 마치 온 세상이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바뀐 느낌이었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의 색깔이 이렇게 7가지가 맞나요? 당연한 걸 왜 묻냐고요? 색에 대한 언어가 발달되지 않은 어느 아프리카 부족들은 두세 가지 색으로 무지개의 색깔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들의 눈에는 무지개가 두세 가지 색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은 눈에 대한 단어가 5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50가지가 넘는 다양한 눈들을 모두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냥 눈인데 말입니다.
‘세상은 당신이 볼 수 있는 것들의 합이다. 당신은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을 통해서만 세상을 규정할 수 있으며, 나는 그걸 ‘인지 공간’이라고 부른다. 우리 모두의 인지 공간은 각각 다르다.’
김종원 작가의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만 나의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사실은 저마다 다른 세상을 보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언어의 다양함이 다양한 세상을 보여주고, 내가 가진 언어의 섬세함이 깊이 있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언어들을 습득함으로써 언어의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이미 내가 가진 언어들을 섬세하게 다듬어 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가 가진 언어를 섬세하게 다듬어가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어떤 세상을 만나게 될까요?
아침 집을 나서는 데 비가 옵니다. ‘에이, 비가 오네.’ 인상 쓰며 집을 나섭니다.
우산을 쓰고 한적한 길을 걷습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립니다. 귀 기울여 보니 토도독 떨어지는 빗소리가 앙증맞습니다. 바람과 강물이 빗소리 사이로 스쳐갑니다. ‘좋다.’
집을 나설 때 가졌던 첫 생각과 달라졌습니다.
내 생각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순간, 세상은 내가 본 모습 그대로 고정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판단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보면 세상은 내 생각과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A : (짜증 난 표정으로 말한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래?”
B : (궁금한 표정으로 말한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럴까?”
“도대체 왜 저래?”라고 짜증 내는 순간, 상대방은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뉜 2분법의 세계에 머물게 됩니다.
“도대체 왜 저럴까?” 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보면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아, 저 사람은 이럴 땐 이런 반응을 보이고 저럴 때 저런 반응을 보이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오래 보면, 더 많은 것이 보입니다. 마치 뛰어난 한의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의 안색만 보고도 그 사람의 병증과 평소의 생활 패턴을 알 듯, 상대방이 걸어왔던 삶의 여정이 함께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을 정현종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정현종, <방문객> 중에서
이렇게 한 사람의 일생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면, 어쩌면 그 사람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를 비트겐슈타인은 ‘생각하지 마라. 단지 보라.’라는 말했고, 나태주 시인은 ‘자세히, 오래’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예쁘고 오래 보니 사랑스러워지는 세상이 있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세심하게 살필 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있습니다.
‘왜 저래?’가 아니라 ‘왜 저럴까?’라는 물음으로 그 다채롭고 새로운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 봅니다.
그이름을 알기전에
내겐그냥 꽃이었네
그이름을 알고나니
다채로운 세상됐네
아는만큼 볼수있고
본만큼만 나의세상
내언어가 다양하면
많은것을 볼수있고
나의언어 섬세하면
깊이있게 볼수있네
저사람은 왜저럴까
짜증나고 보기싫네
이말속에 갇히면은
내세계가 좁아지고
저사람은 왜저럴까
이해하며 바라보면
상대방이 이해되고
내세계가 넓어지네
생각마라 단지보라
보다보면 보게된다
자세하게 바라보고
오래도록 바라보면
다채롭고 새로우니
그세상을 누려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