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차
우리 집에서 가장 바쁜 거 같아.
매일매일 내가 해치운 일, 해치워야 할 일들에 대해 얘기할 때면 남편이 늘 하는 말이다.
한동안 서평단 책을 너무 많이 받아서 1일 1 리뷰를 써야 했던 때가 있었다. 성격상 대충은 못 쓰는데 생각보다 별로인, 어려운, 재미없는... 책을 받을 때면 쓸 말을 어떻게든 짜내서 썼다. 애정하는 장르인 그림책인 경우에는 어렵게 출판사의 픽을 받아서 출간된 책일 테고 작가가 최소 2-3년을 고생했을 걸 알아서 '심폐소생술'이라도 했다. 뭐 하나라도 좋은 점을 꼭 찾아내서 써주었다.
어쨌든, 어찌어찌해서 서평을 올리고 나면 해치웠다는 속 시원함과 해냈다는 뿌듯함이 동시에 들었다.
네이버에 '해치우는'과 '해내는'을 썼더니 이렇게 비교해 주었다. 그렇다. '해치우는'은 신속하게, 의무감을 가지고, 제 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내는'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도 있게, 제대로 해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삶은 대부분 해치워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지만 부지런히 해치우다 보면 해내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
통역사 시절에는 회사에 가면 나의 컨디션과는 별개로 하루에도 여러 번 여기저기로 불려 다녀야 했다. 내가 듣고 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듣고 말해야 했다. 기계라고 해도 그 정도 사용하면 뜨거워지겠다 싶을 정도로 혹사한 날들도 많다. 잘 못한 날에는 자괴감도 느껴지고 창피하기도 하고 그만두고 싶었다. 퇴근 버스에 타면 눈물이 핑 돌아서 내일은 출근하지 말까 하고 생각한 날이 많았다. 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매일 해치우며 버텨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들을 해치우다 보니 어느새 해내는 게 당연한 내가 되어있었다.
육아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역할은 처음이라서 우는 아이를 내려놓지 못해서 날이 밝을 때까지 안고 있던 적도 있었다. 공간과 사람이 조금만 바뀌어도 알아보고 청각도 예민한 아이라서 자꾸 우는 탓에 문화센터에 등록해 놓고 들어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계속 읽어달라고 책을 들고 오고 안 읽어주면 읽으라고 손으로 내 입을 톡톡 치는 아이를 상대할 때는 통역사 시절보다도 목이 더 아팠다. 매일 뭐라도 해야 시간이 갔다. 그렇게 아이와 온종일 함께 지낸 날들도 매일매일 해치운 날들이었다. 27개월이 다되어서야 어린이집에 보냈다. 어린이집에 보내기까지는 힘든 육아를 잘 해치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와 돌이켜 보니, 해낸 시간이었다.
아이를 어린이집, 유치원에 보내고부터는 아이가 오기 전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치웠다. 그림책 세계에서 이것저것 배우다 보니 이런저런 자격증도 따고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틈나는 대로 해치운 독서로 자기 성찰 및 자기 돌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를 다시 키웠다. 열 살이 된 아이만큼 엄마 사람 나이 열 살이 된 나도 기특하다.
이제 나는 안다. 하기 싫은 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그냥 해치우면 된다. 무언가를 잘하기 위해서 꾸준히 보내야 하는 시간도 해치우면 된다. 자꾸 해 치우다 보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내는 뿌듯한 내가 될 것이다. 그러니, 내일도 내일의 일을 해치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