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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착한별 Oct 25. 2024

"네가 뭘 해”라는 말에서 빠져나오기까지

Why not?


“엄마, 난 기차 만드는 사람이 될래”


“엄마, 나 기차 만들면서 라디오 DJ나 작가도 해도 되나?”     


“그럼, 다 할 수 있지. 정말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을 때까지 이것저것 시도해 봐도 돼. 앞으로 너는 평균 수명 120세인 세상을 살 테니 직업이 여러 번 바뀌어도 되지.”     


어릴 적에 나도 내 아이처럼 호기심이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아빠의 공장이 망한 후로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들, 삼촌과 함께 살던 우리 형편에 내가 뭔가를 배우거나 하고 싶다고 말하면 엄마는 “네가 뭘 해”라고 했다. 그걸 가르칠 혹은 뒷바라지해 줄 여유가 없으니 일 벌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분명히 그 말은, 내가 할 수 있는 재능이나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삶이 힘든 엄마에게는 딸에게 희망을 줄 여유나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네가 뭘 해"의 힘은 강력했다. 나는 누군가의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는 예민한 아이였고 곁에 있는 사람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학원 하나 다니지 않았어도 고등학교 입학까지는 상위권 성적이었던 나는 아예 공부에서 손을 놓았다. 아빠는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벌라며 할아버지 세대에서나 했을 법한 말을 했고 엄마도 내가 아빠의 말을 들었으면 했기에 난 공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게다가 학교만 다녀와도 쉽게 지치는 저질 체력이었다. 결핍과 절망이 가득한 현실에서 잠으로 도피하는 일이 내겐 최선이었다. 만약 희망을 주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내 곁에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네가 뭘 해"라는 말을 들었어도 나는 공부를 했을까? 분명히 "네가 뭘 해"라는 말을 듣고 자랐어도 극복한 사례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렇지를 못했다.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챙기고 사랑할 줄 몰랐던 나는 가만히 넋 놓고 시간을 보내다가 수능 시험 날에 멘털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경험했다. 오늘의 시험이 나의 인생을 결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왜 하필 수능 날에서야 든 건지. 언어영역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풀고 2,3교시 과목은 공부한 적이 없으니 모두 찍어버리고 외국어영역만 정신 차리고 풀었다. 결과는 비참했다. 정말 창피한 점수였다.



외국어 영역 하나 틀린 나를 담임 선생님은 내게 외국어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외국에 1년 보내주는 대학에 원서를 써주었다. 막상 붙으니 집에서는 등록금을 대주었다. 그렇게 보내줄 거였으면 처음부터 대학가도 된다고 해주지. 열심히 공부하라고 해주지. 이미 사고를 친 나는 혼란스러운 날들을 보냈다. 대학 면접 때 교수님은 내 외국어영역 점수를 보시고는 "자네는 왜 여길 왔나?"라고 물으시기도 했다. 부모님이 대학 가지 말라고 해서 방황하다가 수능 시험 다 찍고 외국어 영역만 잘 풀어서 여길 오게 되었다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다. 지금처럼 책에서 답을 찾던 아이도 아니었다. 그 후로도 내가 나를 방치하는 날들은 계속되었다. "네가 뭘 해"의 늪이었다. 공부 안 하다가 이름 없는 대학에 오게 되니 자존심이 상하고 자존감이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부를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증명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재수나 편입이라는 방법이 있는 줄도 몰랐다. 과 친구들이 러시아에서 몰래 편입을 준비했다가 귀국 후에 절반 이상 사라진 걸 뒤늦게 알고 무척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얼'이라는 게 없이 '멍' 하기만 했던 날들이었다. 학과 과정인 러시아 어학연수 가는 걸 허락하는 대신 취직을 책임지라고 교수님과 딜을 했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4학년 2학기부터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게 첫 단추가 되어서 크고 작은 회사에서 12년이나 러시아어 통번역사로 일했다. 나의 의지 없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흘러간 삶이었다. 




2030 시절 동안 나는 여전히 "네가 뭘 해"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어쩌다가 누군가의 칭찬을 들어도, 뭘 해보라는 말에도 ‘네가 뭘 해’라는 말이 늘 마음속에서 먼저 들렸다. 무언가를 잘할 때마다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했다. 어렵게 끌어올려도 나의 자존감은 단번에 무너지곤 했다. ‘네가 뭘 해’에 자꾸만 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나는 엄마가 되었다. 내 아이에게는 절대로 "네가 뭘 해"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나이 되어서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던 엄마를 탓하는 게 아니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사정도 이해가 된다. 내가 20대의 나이에 워킹맘으로 살았다면 난 더 가시 돋친 말들을 아이에게 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시대처럼 육아법이 중요시되던 시대도 아니었다. 오은영 박사도, 조선미 박사도, 김종원 작가도, 지나영 교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엄마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원인을 찾았으니 그걸로 됐다. 내면 아이 들먹이며 울고불고 짜고 싶지 않다. 내면 아이도 아이다. 눈물 뚝뚝 흘리며 그 아이를 안타까워하며 안아주기보다는 그 아이에게 나 스스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나 리모델링’ 해서 이제부터라도 잘 살면 된다. 이제는 '멍'한 사람을 살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하는 말들을 나 자신에게도 열심히 해주고 있다. ‘네가 뭘 해’가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Why not?’으로 들이미는 연습이다. 그게 내가 찾은 방법이다. 물론 단번에 내가 달라지긴 어렵다. 서서히 "네가 뭘 해"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네가 뭘 해"가 찾아오는 순간을 인지하고 그것을 다룰 줄 알게 되었다. 그 정도면 많이 발전한 거다. 내가 나를 더 잘 키워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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