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낳고 책육아를 하겠다고 거창하게 마음을 먹었다. 다른 책육아맘들처럼 TV 없는 거실, 거실의 서재화가 목표였다. 아이가 두 살, 세 살 되면서 어떤 책을 읽어줘야 할지 고민이 생겼다. 구입할 책을 찾다가 자연스럽게 인스타그램에 입문하게 되었다. 부담스러운 전집보다는 인스타그램에서 공구로 진행하는 소전집이나 단행본을 구입하는 게 편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5살이 될 무렵에 다닐 유치원을 알아보다가 그림책을 기반으로 하는 놀이 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내가 딱 원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림책 한 권을 한 달 내내 보면서 읽고 토론하고 만들면서 놀이도 하는 프로젝트 수업(PBL:Project-based learning)을 하는 곳이었다. 미래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해당 강의와 책을 챙겨보던 나로서는 '바로 이곳이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월 백만 원이 넘는 곳을 5세부터 보낸다는 것은 너무 큰 부담이었다. 3년 치 비용을 계산하니 남편에게 아이를 이곳에 꼭 보내야 한다고 우길 수 없는 금액이었다.
보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질 않아서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다. 책을 좋아하고 서로 아이디어 내면서 놀이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에게 딱인 기관인데 라는 마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그러다가 보낼 수 없다면 내가 배워서 아이에게 가르쳐 보자라는 생각으로 그림책을 파기 시작했다. 그게 '그림책 세계'에 들어온 나의 첫 발이었다. 무작정 검색창에 '그림책 수업'이라고 쳐서 나온 분과 연락해서 토요일마다 4시간씩 1:1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은 그림책 지도사 자격 과정이었는데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유레카!
'그림책을 이렇게도 볼 수 있다고!'
내가 아는 그림책이란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 그림이 대부분이고 글밥이 적은 책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글과 그림을 읽는 법을 알게 되자 그림책 세계로 블랙홀처럼 빠져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이 추천해 준 그림책들을 모조리 사서 집에 왔다. 그러고도 사고 싶은 그림책이 많아서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는 늘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2019년 12월. 그림책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림책으로 받은 첫 자격증이었다. 결혼 1년 차까지만 일하고 임신, 출산, 육아로만 몇 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는데 생각지 못한 분야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단조로웠던 일상이 생기를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 시국이 되었고 '비대면 시대'가 열렸다. 나는 이제 막 그림책과 연애를 시작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할 새 없이 온라인으로 만나는 그림책 콘텐츠는 넘치도록 많았다. "저랑 같이 일하실래요?"한마디에 그림책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1일 1 그림책을 읽고 인증하는 모임을 오랫동안 진행했다. 책과 그림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강의도 했다. 그 후에는 그림책 심리상담과 그림책 북큐레이터 자격증도 따고 교육용 출판 그림책 만들기를 배우면서 미니 더미도 만들어 보고 해당 교육을 할 수 있는 강사 자격증도 땄다. 장애인 대상 그림책 만들기 수업도 해 보고 고등학생과 사서교사 대상으로 그림책 강의도 했다. 무엇보다 3년 동안 꾸준히 블로그에 그림책 리뷰를 썼다. 그리고 지금은 주 1회 모이는 그림책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내가 만난 그림책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었다.
다른 분야의 책들도 꾸준히 읽었지만 그림책을 가만히 들여다본 시간이 더 많다. 그림책과 만나면서 내 인생은 바뀌었다. 그림책으로 지나온 나의 삶과 내 감정, 인간관계 등을 되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우고 깨달았다. 그림책을 만나기 이전에는 누구도 이렇게 내게 다정하게 알려준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볼 때마다 다르게 읽히는 그림책의 매력은 돌아서면 다시 생각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림책과 연애 중이라는 표현을 쓴다. 만날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그림책이라서 이 연애의 끝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는 그림책에 푹 빠진 사람들이라면 공감이 될 말이다. 그림책의 맛을 알게 된 사람은 누구나 그림책 전도사가 된다. 나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림책 세계에 산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그림책을 읽는 사람들이나 알지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른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직 모두가 열광하는 분야가 아니어서 내가 그 세계를 먼저 알고 들어와 있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게 뭔데 한 권에 16,000원이냐 하냐고 말할 때 작가가 2-3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쓰고 그리고 반복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세계관과 메시지를 알아볼 수 있는 나라서 참 행복하다.
그림책과 연애 중 5년 차.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처음 만났던 윤지회 그림책 <방긋 아기씨>에서 왕비는 아기를 낳기 전부터 파란 피부에 웃고 있지 않았다. 엄마를 보고 있는 아기에게 웃어주지 않는 엄마이기 이전부터 그랬다는 뜻이다. 나는 왕비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나의 출산 전 히스토리를 떠올렸다. 신혜은 글, 김효진 그림의 <마음아, 작아지지 마>에서는 자꾸 작아지던 내 마음을 보았다. 이제는 마음을 키우는 법을 안다. 그림책 <마음 빨래>에서 처럼 스스로 얼룩 지우는 법도 알고 그림책 <감정 호텔>의 지배인처럼 나의 감정을 보살필 줄도 안다. 그림책 <민들레는 민들레>의 메시지처럼 <조은주는 조은주>라는 것도 깨달았다. 이현주 그림책 <이까짓 거!>에서처럼 우산이 없어도 뛸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겼다. 지난 5년 동안 내가 만난 그림책들이 나를 다시 키웠다. 앞으로 10년, 20년 그 후에도 오래오래 그림책과 함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