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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덕목
11화
어른의 덕목 10. 관계(3) - 타이밍
사람들이 하는 말엔 다 이유가 있지.
by
chalna
Jan 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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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인연에 연연하지 말라지만
그 연연이라는 걸 마지막으로 한 번, 해볼까 한다.
어른의 덕목 10. 관계(3) - 타이밍
가입학식에 오는 갓 8살 어린이들을 만나는 건
퍽 즐거운 일이다.
올해는 유난히 아빠들이 동행한 경우가 많았다.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또 다른 손으로 아이의 붉은 뺨을 쓰다듬으며 수고하세요- 인사하는 모습을 보다가
떠올렸다.
언젠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걸어 들어올 너의 모습을.
정말로 갑자기, 느닷없이.
이제와. 어쩌자고.
지나간 다른 이들을 두고 어쩌다 하필 그 상상이 너였
을까.
세상의 말로 우리가 무엇이었던 적이나 있었나.
이래서야 그 '무엇'이었던 이들한테 미안해서 어쩐다.
우리가 뭐였는지 나도 모르겠다.
사랑이라 하기엔 멀었던 것 같은데
우정이라 하기엔
좀 짙었다.
하긴, 그때 정의하지 않은 걸 지금 정의 내릴 수 있을 리 없다.
대신 기억나는 건 그런 거다.
어느 날 갑자기 서류 봉투 던지듯 내밀었던 꽃이라던지
생선 뼈를 발라 내 쪽으로 밀었던 손이라던지 그런 거.
회식에서 잔뜩 취한 나를 찾던
염려 어린 전화나
출근길에 데리러 오며 해사하게도 웃던 얼굴 같은 거.
되짚어보니 넌 퍽 다정했다.
그럼에도 난 늘 너에게 화나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우리가 대체 뭔데?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주변의 모두가 아는데도
왜 마지막 선을 넘어오지는 않는 건데?
난 늘 너의 마음을 의심했다.
우리 관계란 그런 거였다.
끝내는 별것도 아닌 일로 모진 말을 주고받으며
그 '친구'도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네가 주었던 수많은 좋은 것들을 매도했다.
그래.
넌 네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만 애정을 즐겼던 거구나
.
너는 책임감 없이 그저 유희였던 관계에 내가 흔들렸구나.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알아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 변함없이 곁에 머물고
이야기를 듣고, 사소하게 나를 챙기고,
네 말이 맞아, 넌 참 좋은 사람이야 말해주던 게
너에게도 그저 유희였을 리는 없다는 걸.
그 관계의 형태가 어땠든 그 속에 품고 있던 건
틀림없는 애정이었다는 걸.
우리는 긴 시간 불안정한 어떤 지점에 머물러 있었고
난 그 모든 결정이 너의 손에 달린 것처럼 굴며 억울해했지만
사실 나는, 네가 주던 불안정한 애정과 어설픈 친구라는 이름마저 잃게 될까 무서웠다.
상처받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어쩌면 너도 그랬을지도.
어쩌면 너에게도 어떤 불안이나 걱정이 있
었
을지도.
어쩌면 너도 나처럼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가끔 생각해 본다.
지금의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우리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조금이나마 깊이가 생긴 나라면
너라는 인연을 그렇게 떠내려 보내지 않았을 텐데 하는.
그 시절의 나는 너를 헤아리기엔 너무 어렸고
숨어있던 애정을 살피기에 미성숙했으며
그 찬찬하던 다정함을 느끼기엔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어쩐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닌 것을.
우리, 시간은 끝이 났고, 방향은 틀어졌다.
이러니 타이밍이라 하나보다.
사랑이든 사람이든.
어긋났으니 잘 보내줄 수밖에.
너를 향해 먹었던 나쁜 마음들은 내려놓고,
그래, 좋아했지. 따뜻했지. 하고 추억할 수밖에.
네가 알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가끔 너의 손끝을 유심히 살피곤 했다.
어울리지 않게 길고 가느다란 손끝이
책장을 넘기거나, 책상을 두드리거나 하던 모습.
날이 춥다며 벗어 건네던 장갑과 네 하얀 손끝.
우습게도, 얼굴보다 그런 게 더 선명하다.
어느 날 너만큼 해사한 미소를 가진 순진한 얼굴과
손 붙잡고 걸어올 너를 마주하고 싶다.
그제야 건강하게 안부 물으며
밝
게 인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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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덕목
09
어른의 덕목 8. 품위(1)- 말의 함정
10
어른의 덕목 9. 미묘한 아득함
11
어른의 덕목 10. 관계(3) - 타이밍
12
어른의 덕목 11. 감정(2) - 잘 울기
13
어른의 덕목 12. 품위(2) -너한테나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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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30대의 ‘나’ 찾기 & 작고 안온한 교단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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