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생의 비상대책 위원회

절체절명의 시기에 절벽 위에 서다

살다 보면 누구나 비상 대책 위원회를 꾸려야 할 순간을 맞는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3 수험생 시절, 취업을 앞둔 대학 4학년, 승진을 기다리는 직장인의 시기…. 나 역시 이런 시간을 지나왔다. 그리고 또 다른 비상 시기를 맞게 되었다.

주재 근무를 마치고 가족을 미국에 남겨둔 채 나 홀로 귀국해 직장 생활을 이어가던 때였다. 아내에게는 3개월만 기다려 달라 약속하고, 미국 취업을 위해 지원서를 쏟아냈다. 처음에는 몇 번의 인터뷰 기회도 있었지만 금세 현실의 벽을 느꼈다. 문과 출신 인문학도였던 내 이력은 미국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차례 거절당한 뒤에도 끊임없이 지원했지만, 어느새 1천 곳이 넘는 회사에 이력서를 보내고 나니 더는 보낼 곳조차 남지 않았다. 취업 사이트는 이미 지원한 곳은 다시 보여주지 않았고, 화면은 늘 ‘빈칸’이었다.


그 무렵 나는 지쳐 있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화상 면접을 보던 생활이 이어지자, 자신감은 점점 바닥을 쳤다. 한동안은 아예 지원도 멈추고 무작정 쉬었다. 아들과 매일 화상 통화를 하고 아내와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희망적인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냥 한국에 들어와서 살까? 집도 정리하고… 그게 편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만큼 마음은 흔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드물게도 유력해 보이는 회사에서 면접 요청이 왔다. 정말 중요한 기회였다. 퇴근 후 예상 질문과 답변을 정리하며 밤 11시 30분 면접을 준비했다. ‘딱 두 시간만 자고 일어나면 맑은 정신으로 임할 수 있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알람을 맞추고 눕는 순간, 나는 밤잠 모드로 깊이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 시계는 11시 27분. 아뿔싸! 부랴부랴 노트북을 켰지만 저사양 컴퓨터는 말을 듣지 않았다. 강제 종료와 재부팅 끝에 Zoom에 접속했을 때는 이미 11시 37분. 면접은 시작한 지 7분이 지나 있었다. 다행히 인사 담당자가 기다려 주었지만, 정신은 흐릿했고 답변은 엉망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오랫동안 새로운 지원도, 면접도 시도하지 않았다.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건 한참 뒤였다. 아내는 미국 생활을 정리하는 차원에서라도 내가 방문하길 원했고, 나는 저렴한 항공권을 구해 뉴저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한 인터뷰에 나섰다. 이번엔 달랐다. 내 이력과 강점,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한 핸드아웃을 직접 인쇄해 면접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통상적인 면접에서는 하지 않는 파격적인 방식이었다.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함이 그 행동을 낳았고, 그것이 오히려 면접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금 나는 오히려 채용을 진행하는 입장에 서 있다. 지원자들을 만나 면접을 보면서, ‘내가 과연 그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솔직히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인생에는 모든 일마다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비상 대책 위원회가 삶을 바꿔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기에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간절히 소망하는지가 인생을 결정짓는다. 나는 그것을 뼈저리게 경험했고, 지금도 그 믿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keyword
이전 18화미국 납세자로서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