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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Jan 12. 2024

냅다 짐 싸부렀다

무안 시골살이 적응기 - 비하인드스토리




"나 같으면 도저히 못 갈 것 같아. 언니는 그게 어떻게 가능해? 고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이잖아."

무안으로 내려온 이튿날, 동생과 통화하던 중에 동생이 한 말이었다. 초대해 주니 냉큼 네, 한 건데 내가 이상한가. 

"ENFP라서? 하하."


"하긴. 언니 성격이라면.

고모가 우리 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해 주셔서 좋은 분이란 건 알겠는데, 일주도 아니고 한 달을 가 있겠다고 결정한 언니가 정말 신기하다. 어색하지 않아?"

"어색하진 않네. 고모가 거의 나가 계셔. 하하. 고모가 더 대단하시지 않냐. 조카라는 것 말고는 내가 어떤 사람인 줄 모르시는데 선뜻 그런 제안을 하셨을까?"


1월 8일 월요일, 우리 아버지의 고향이자 두 고모가 사는 전라남도 무안에 짐을 싸 들고 내려왔다. 다섯 고모 중 둘째인 순이 고모의 제안대로 한 달을 살아볼 요량으로.


고모네 현관에서 찍은 동 트는 하늘.




순이 고모는 십육 년 동안 혼자 살아온 분이다. 남편의 외도로 나이 육십에 원치 않는 싱글이 되어 큰언니가 살고 있는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형제 분들이 힘을 보태 작은 땅을 구입하여 양파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마당이 있는 집에 몸을 누일 수 있게 된 순이 고모.

"암 것도 없었시야. 기양(그냥) 내 몸뚱이 하나 건진 게 다여."


내 기억 속의 순이 고모는 168센티미터의 늘씬한 키에 형제들 사이에 부자로 통했다. 조카들 만나면 환하게 웃으며 큰 용돈을 척척 주는 분이었다. 서울 사는 우리 남매가 남도에 사는 아버지 형제분들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어서 오십 살이 넘도록 고모를 대여섯 번 본 게 다지만 드물게 만난 대신 좋은 기억으로 남은 분.




칠 년 전 엄마의 장례식에 아버지 형제들이 전남에서 서울까지 조문을 오셨다. 형제 분들은 우리 엄마를 '성실한 분, 좋은 분, 유쾌한 분'으로 입모아 추억했다.

장례식 후 형제 분들의 제안으로 순이 고모네서 한 달 지내기로 한 아버지가 일주일 만에 마음을 바꿨다. 당신 집에서 지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울먹일 듯 부탁하는 아버지를 모시러 300킬로미터가 넘는 먼 길을 달려갔다.

그때 느낀 순이 고모는 묵묵히 행동하며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챙기는 분이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순이 고모는 혼자된 오빠를 살뜰히 챙기느라 철마다 각종 식재료, 김치 따위를 부쳐 주곤 했다.

우리 삼 남매 나눠 먹으라고 많은 양을 보내주시는 덕에 참기름이나 고구마가 내 친구들의 손에까지 간 적도 여러 번. 인심 좋은 고모는 우리들 기억 속에 따습게 남아있었다. 그래도 늘 아버지가 인사했지, 내가 일부러 찾아뵐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 못한 형제 분들은 작년에 2년 만의 송년회를 하였다.(아래 링크 눌러서 참조)


https://brunch.co.kr/@changada/181


아버지와 일주일 정도 송년회에 다녀오기로 한 나는 아버지를 모시러 서울 강북까지 올라갔다가 무안으로 함께 내려다.

거기에서 백수 창창이 훗날 은인이 될 순이 고모를 만난 것이다.


순이 고모는 우리 부녀(父女)에게 송년회보다 며칠 앞서 오라고 하셨다.

고모와 밥을 다섯 끼 정도 먹은 저녁.

고모가 앞으로 뭐 하며 지낼 생각이냐 물었다. 고모는 이혼은 왜 했냐, 백수는 왜 됐냐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해서도 돈 벌 일을 물은 게 아니라 그냥 무얼 하며 지내고 싶은지 물었다.


https://brunch.co.kr/@changada/183



"아버지 병원 갈 일이 좀 정리돼야겠지만요. 제가 학원에서 삼십 년 일했거든요. 그래서 육십 되기 전에 다양한 경험 하고 싶어 찾아보려고요. 우선은 석 달 정도 쉬고요. 시골에서 한 달 살이하며 글도 쓸 생각이에요. 지인들 통해 제주도나 강원도 알아보고 있어요. "


내 말을 들은 아버지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 말씀하셨다.

"우리 창창이 좀 쉬어야지. 오래 애썼어."  

순이 고모가 선뜻, 그야말로 선뜻 제안하셨다.  

"먼 데 갈 게 뭐 있냐. 돈 많이 들고야. 여가(여기가) 있는디. 여 와서 글 써 야. 오빠도 함께 오시요."




팔 남매 중 셋째인 우리 아버지를 다섯째인 순이 고모는 어린 시절부터 무척 따랐다고 한다. 그 시절을 얘기할 때 아버지와 고모는 꿈꾸는 얼굴들이 된다. 특히 순이 고모에게 둘째 오빠는 늘 그리운 존재였나 보다. 그런 오빠의 딸이라 무조건 미더워 보였을까. 노쇠한 아버지를 모시고 먼 길을 달려온 조카여서 이뻐 보였을까.


"생활비 낸다고 괜히 고모한티  생각이면 오지 말고야. 기양 와 부러. 난 아침에 나가서 어두워야 들어옹께. 여가 다 너 것이여. 만고 땡 아니냐."

"고모, 저 진짜 와도 돼요?"

순식간에 칠십 대와 오십 대 두 싱글녀의 한 달 동거 약속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데이케어센터'에서 당신의 루틴을 지키며 살고 싶다며 거절하셨다.


집안 어르신과 매일 함께 지내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모르는 소리라고, 현실적이지 못한 나를 답답해할 분들이 있을 테다.

순이 고모는 타인의 행동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는 분이라서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쿨하다는 내 나름의 안테나를 근거로 판단했다.


아버지 칠 남매. 큰아버지 부부, 막내고모 부부를 제외하고 모두 싱글이다.

 

송년회 1박 2일 동안 째 고모(엄청 부지런하고 인정 많은 분이다)가 수시로 물휴지를 들고 집안 여기저기를 닦았다.

순이 고모가 자존심 상해할까 봐 내가 공연히 조마조마했는데, 순이 고모는 암시랑토안했다.

"기양 둬브러."

"살림 잘 못한다고 뭐라는 것 같아 속상하진 않으세요?"

"잔소리하며 닦았으면 나도 싫지야. 암말도 않고 해 주자네. 고맙제잉."

순이 고모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면 되는구나, 알았다.




순이 고모에게 1월 2일에 무안으로 출발하겠다 약속드리고 우선 안산으로 돌아왔다. 계획은 매일 글쓰기 글벗들, 볼링 동생들, 싱글들과 송년회 겸 송별회를 마치고 아버지와 연말연시를 보낸 뒤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틀니를 바꿔야 할 일이 생겼고 여러 번 병원에 들러야 했다.

스란히 내가 치러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오빠와 동생이 12일 치과 일정과 주말 돌봄 일정을 대신하겠다고 해 준 덕분에 8일, 드디어 무안행을 실행할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필요한 짐을 10리터 캐리어에 욱여넣었다. 티셔츠와 니트 모두 네 장, 바지 세 개, 패딩과 점퍼, 화장품, 책 다섯 권이었다. 물론 나의 생각단지 노트북은 제일 먼저 챙겼다.

냉장실에서 상할지 모르는 식재료가 문제였다. 친구들에게 나눠 줄 것은 주고, 나머지는 모조리 고모네로 가져왔다.


고모는 인터넷 연결 여부를 문의했지만 안 된다고 하니 어떡하냐고 걱정하며 전화했다. 모바일 핫스팟을 사용할 생각이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새벽 6시 온라인 합평이 두 번 있고, 낮 3시의 온라인 토론이 있다. 불참도 염두에 두기로 했다. 인터넷이 안 되는 공간이라... 콘텐츠에 중독된 나를 다스릴 기회일 수도 있다. 문제는 '글쓰기'였다.


순이 고모네서 2 천보쯤 걸어간 면소재지에 새마을 도서관이 있다. 하지만 오래 사용하지 않았는지, 굳게 닫혀 있었다. 근처에 카페도 두 군데 있다. 한 군데는 테이블이 달랑 두 개밖에 없어 못 들어갔고, 큰 카페는 눈치가 보여서 가지 못하겠다.


지난 12월소설을 수정하려고 큰 카페에 나흘 다녔다. 서너 시간 죽치고 앉아 쓰기 미안해  이 만원 가까운 식사와 차를 주문했는데도 다른 손님들과 심하게 대조되었다. 다른 손님들은 한 시간 이내에 커피와 차을 세 모금 때려 넣고 카페를 나서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고모 댁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무안 공공 도서관을 이용하고 있다. 노트북 키보드 소리 난다고 에서 쓰라는데, 눈치 볼 사람은 없으니 나쁘지 않다.


무안 도서관에서 집으로 퇴근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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