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만나는 사람들

말은 안 하지만 다 아는 사이

by 채널김

요즘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뛰다 보니 자주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운동 초반에는 힘들어서 잘 보이지 않었었는데 이제 제법 여유가 생기면서 주변을 돌 수 있었다.

야외 러닝은 매일 바뀌는 풍경과 더불어 지루하지 않게 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새벽마다 날 재미있게 하고 놀라게 하는, 그리고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지팡이를 짚고 뛰는 할아버지

러닝은 연령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다. 대회에서도 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참가해 젊은 친구들 보란 듯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 정도는 많이 봐와서 놀라지 않았는데 이 새벽에 마주친 그 할아버지는 정말 놀랐다.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도 약간 굽으셨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뛰고 계셨다.

나는 처음에 걷고 계신 줄 알았다. 하지만 분명히 천천히 "뛰고" 계셨다. 그것도 한쪽손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말이다. 그 모습이 너무 인상 깊어서 나도 모르게 몇 걸음은 속도를 늦췄다.


"와.. 저 나이에도 저렇게 열정적으로 달릴 수 있다니!"

아마도 꽤 오랫동안 뛰어오셨을 것이다.

이제는 두 다리만으로는 힘드셔서 지팡이에 의지해서 달리셨지만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물론 내가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이긴 하지만 제법 긴 거리를 달리셨다. 이제 좀 뛰기 시작한 나도 저 나이가 될 때까지 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칭에 진심인 어르신들

내가 뛰는 하천에는 어르신들이 많다. 기본적으로도 사람이 많긴 하지만 새벽시간이다 보니 그런 거 같다.

그리고 그 하천은 가운데로 물이 흐르고 양 옆으로 길이 나 있는 형태다. 중간중간에 양 옆 길을 이어주는 다리가 몇 개 있는데 여기엔 약속이나 한 듯 어르신들이 각각 난간에 자리를 잡고 계신다.



그 난간은 쇠로 된 길고 둥근 형태로 이어져있다.

거기에 약속이나 한 듯 다들 다리를 쭉 뻗어 올려놓으신다. 아니 다들 왜 이렇게 유연하시죠? 그러고는 폼롤러에 다리를 문지르듯 열심히 마사지하신다. 한두 명이 아니라 단체로 하신다. 옆 사람과 수다도 떨고 늘 보던 사람인 듯 서로서로 인사도 많이 나누신다. 제대로 된 야외 요가클래스다.



새벽 야채 시장

새벽 5시에 작은 시장이 열린다. 시장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돗자리 하나 펴고 그 위에 상추, 대파, 매실 등을 올려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있다. 그 이른 시간부터 분주하게 정리하고 계시는데 손님이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다른 할머님들이 와서 이것저것 고르고 사가신다.


소소하게 수다도 떠시는 거 같고 서로의 손에서 손으로 천 원짜리 몇 장이 왔다 갔다 한다. 거의 매일 보는 거 같은데 내가 다시 되돌아오는 3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돗자리는 없어져있다. 정말 빨리 열리고 해가 뜨기 전에 사라지는, 그래서 부지런한 사람들만 살 수 있는 새벽전용 시장이다.



샌들 러너의 위엄

달려야 한다면 최소한 러닝화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커뮤니티를 뒤적거리다 보면 어떤 운동화가 "쿠셔닝이 좋은가", "착용감이 어떤가" 등의 이야기가 많이 오간다. 그래서 나도 얼마 전에 입문자 치고는 괜찮은 러닝화도 하나 장만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속도를 앞지르고 지나갔다. 흔한 일이어서 아무 생각 없었다. 그런데 반짝이는 스팽글이 달려있는 반소매 옷이 내 눈길을 끌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 발을 내려다 보고는 깜짝 놀랐다. 운동화는 온데간데없고 샌들을 신고 계셨다. 날이 덥긴 하지만 샌들? 러닝용 샌들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슬리퍼를 신고도 잠깐씩은 뛸 수 있다고 생각한다만 그 아주머니는 내 앞으로 한참을 가셨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생각만 들었다. 하루 이틀 뛰어본 실력이 아닌듯한 모습에 머리솟이 혼미해졌다. 역시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 건가?



외발 자전거 아주머니

하천엔 산책길과 함께 자전거길도 꽤 잘되어 있어서 라이딩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외발 자전거를 보는 건 흔하지 않다. 가까이서 본 외발자전거를 보고 든 생각은 '바퀴가 굉장히 크고 안장이 높다'였다. 이 바퀴 하나짜리 자전거를 타지는 않고 손으로 끌고 가시는 아주머니를 종종 봤다.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며칠 뒤에 왜 안 타고 다니시는지 이유를 알았다.


자전거를 아직 잘 타질 못해서 연습을 열심히 하고 계셨다. 그래 저건 아무나 쉽게 탈 수 있는 게 아니지! 한 발 올려놓으면 기울어지고, 발 한번 구르기 어려운 자전거다. 그냥 타고 싶어서 일수도 있고,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 타려고 하시는 거겠지만 며칠이나 실패를 거듭하면서 연습하는 모습을 봤다. 조만간 성공해서 잘 타는 모습을 봤으면 해서 나도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


커플 러너들

커플로 뛰는 거 부럽다.


오리가족

하천에 물이 제법 있어서 그런지 물고기도 있고 그 물고기를 먹이 삼는 오리, 왜가리, 백로 등의 새들이 있다. 자연 다큐멘터리 한 편 나올법한 장면이다.


그중에 내 시선을 훔쳐가는 오리가족이 있다. 앞서가는 엄마오리를 따라서 뽀송뽀송한 새끼 오리 서넛이 그 뒤를 잇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다.



힘든 와중에도 오리들을 보면 잔잔하게 힐링이 되고 좋다. 세상 무해한 동영상이 내 앞에서 실시간으로 플레이되는 느낌이다. 이런 소소한 모습에 몸과 마음의 건강을 같이 채울 수 있다니, 내가 힘들어도 계속 나와서 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러닝 하면서 마주친 사람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익명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매일 비슷한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내적 친밀감이 많이 생겼다.


혹시라도 늘 마주치는 그 사람이 안 보이면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 나 또한 어떤 사람의 기억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그 사람도 같이 느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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