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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Sep 23. 2020

어느 소설가의 꿈

베스트 셀러 소설가의 특별한 비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머리를 싸매고 하루 종일 끙끙거렸습니다. 글이 도무지 써지지 않아서요. 빌어먹을, 아득바득 소설 하나를 완성시켜 어렵사리 등단한 지 벌써 5년인데, 첫 소설 이후로 이렇다 할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채 홀로 침전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도 박민규 씨처럼 창의력이 한 여름 땀방울처럼 자연스레 펜대 끝에서 몽골몽골 맺히길 바라요. 


지금처럼 좋아하는, 혹은 좋아했던 작가들의 성향이 짬뽕된 글만 써대는 소설가는 벗어나야 해요.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베르베르의 초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하루키가 좋아하는 피케 셔츠를 입고 겨드랑이가 땀에 젖은 고양이 마니아 주인공이 공지영 소설에 나올법한 대사를 읊어댄단 말이지요.


아, 정말 이대로는 안돼요. 소설가를 그만둬야 하나 봐요, 할 차에! 나는 정말 하루키 소설에서 나올 법한 기묘한 양을 만났습니다. 머리는 양이지만 꼬리는 쥐꼬리에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짓말 같다고요? 에이, 정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의심하면 안 돼요. 이다음에는 더 믿지 못할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 양은 고리 달린 토성처럼 생긴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메에- 메헤에-" 울었는데 그건 나의 고민을 해결해 준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고마운 맘에 양의 손을 덥석 잡자, 양은 다짜고짜 나의 왼손 약지를 깨물었습니다. 


"악!" 나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손가락 끝에 피가 맺혔어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양을 노려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녀석은 씨익 하고 웃더니 피가 맺힌 내 약지로 자기 이마를 콕, 찍더군요. 그때였어요. 양의 존재, 그러니까 양을 물질적으로 구성하던 경계들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텍스트化' 되어 서있던 그 자리에 와르르, 하고 쏟아져 내렸습니다. 나는 누가 볼까 허겁지겁 텍스트 더미를 가방에 주워 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방에서 꺼낸 텍스트들은 다행히 한 줄로 이어져 있어 조심조심 엉킨 줄을 풀기만 하면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양입니다.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생김새로 말하자면, 머리는 양이고 꼬리는 쥐꼬리, 나머지 몸은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나타나기 위해 멀고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길에서 우연찮게 다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아! 이 텍스트는 바로 양의 존재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존재와 존재의 이유, 그리고 텍스트로 변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들. 기특한 녀석, 하고 나는 손을 맞대고 살살 비비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기쁨이 한가득! 나는 자신만만해졌습니다. 우선 이 양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 나는 단박에 다시 치열한 경쟁의 수면 위로 상승하며 베스트셀러 소설가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독특한 발상의 소설이라는 평을 받으며 말이죠. 


나는 몇 가지 실험을 더 해보았습니다. 왼손 약지를 깨물어 피를 내고 콕, 찍으면 그것이 사물이든, 생물이든 간에 텍스트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아아, 조심할 필요는 있었어요. 텍스트가 원래의 존재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어쨌든 나는 이 능력으로 오래된 골동품 가게에 들러 사연 있어 보이는 물건들을 텍스트화 시켜 소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아름다운 꽃을 텍스트화 시킨 적도 있습니다. 이쯤 되니 글쓰기는 참 쉽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점점 오만해져 사람을 텍스트화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은 우리 동네에서 참 유명했던 노숙자 겸 변태였죠. 이 사람 참 사연 많더군요. 이 소설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햐, 살맛 납니다. 어때요? 참 부럽지 않습니까. 다른 소설가들이 머리를 싸매고 글을 짜내는 동안 나는 왼손 약지에 한 방울 피만 내면 되니 말이지요. 


오늘도 참 날씨가 좋습니다. 

소설은 금방금방 쓸 수 있으니 새로 산 집 발코니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하늘 구경이나 해야겠습니다. 아야, 이거 새로 산 의자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가시가 있네요. 비싼 값을 못하는군요. 약지를 찔렸습니다. 나는 손가락에 맺힌 핏방울을 무심결에 입으로 쪽, 빨았습니다. 아!! 빌어먹을!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눈 앞에 보이는 내 손이 테ㄱ 스ㅡ트호 ㅏ 도 ㅣㅇ ㅓ갑ㄴ  ㅣ 다  .   .  .




image source: https://unsplash.com/photos/mUtYXnpW1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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