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지대 교육에서 '우연히' 역사를 쓰다

제3지대 역사교육 Note: 초창기 #1

by 샤를마뉴

인간사에서 우연이 필연으로 변하는 일은 적잖이 있다.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 평생 가는 인연으로 이어진다든지,

우연히 했던 일이 인생을 결정짓는 일로 이어진다든지,

우연의 위력은 대수롭게 넘길 만한 게 아니다.


필자에게도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진 경험이 있다.

그 우연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필자는 없었을 것이다.

브런치스토리라는 공간에 글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혹은 썼더라도 지금까지 써온 글과 전혀 다른 글을 썼을 것이다.

제3지대 교육을 경험한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졌다.

그것으로 교육을 고민하는 역사학도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이 시리즈의 초반부는

그 우연을 '역사'로 풀어보려 한다.

역사의 서술은 기초 자료를 필요로 한다.

기초 자료라 하면, 역사를 '기억'하게 만드는 자료를 뜻한다.

글을 쓰기 앞서서, 우연의 역사를 재현하기 위한 자료를 찾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자료를 다시 마주했을 때 감회가 새로웠다.


그 자료들이 담은 시간은,

2022년 2월.

지금으로부터 3년 반 전이다.

시간의 때가 역력히 묻어있었다.


지금부터 그 순간으로

독자 여러분을 소환해

우연의 역사를 들려주겠다.


4~5년 전, 우리 인류는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세계를 강타했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일상은 멈췄다.

봉쇄된 생활에 모두가 암울했다.


그 시기, 필자는 대학 1학년이었다.

정신이 피폐해졌던 입시를 끝내고

'제대로 놀아보자'라는 의지가 불타오르는

그 새내기 시절은

코로나로 허망하게 흘러갔다.


대학 수업은 전부 온라인으로 진행되었고,

그 이외의 시간에도 외출을 한다거나

여가를 즐기지 못했다.

'대학 생활의 시작은 힘들었던 학창 시절과 달리

찬란하게 장식하겠다!' 하는 꿈은 무너졌다.

우울했었다.


그리고 2022년을 맞이했다.

'2022년은 2021년과 다를까?'라는 회의감이 들었지만,

'2022년은 2021년과 반드시 달라야 한다.'라는 의무감 역시 들었다.

다행히 2022년의 시작은 좋았다.


성인에게 요구되는 능력 중 하나가 '경제적 자립'이다.

돈 한 푼 한 푼도 피 같았던 학창 시절의 필자에게

경제적 자립은 환상적인 신기루였다.

그렇다.

경제적 자립을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두려웠다.


그런 필자에게 경제적 자립을 가능케 하는 기회가 찾아왔다.

필자 동네의 구청에서 주관하는 대학생 인턴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이것도 정말 '우연히' 인턴으로 선발되어서 한 일이다.

늦잠을 헌납하고 아침부터 출근하는 자세,

직장(구청)이라는 공간의 분위기,

친절과 격려로 대한 공무원들,

(일이라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시키는 일을 해본 경험,

이것들이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인턴 프로그램이 마무리된 후, 또 다른 일을 해보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될지 몰랐다.

그 어떤 경력도 없고, 가진 거라곤 대학 사학과에 재학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때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어려움을 좀 실감했던 것 같다.


좀 약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몸쓰는 일은 하기 싫었다.

(필자 체격이 그렇게 좋지도 않다.)

그리고 이왕이면 사학 전공을 활용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회 일에 사학 전공만으로 밥벌이를 가능케 하는 법칙이 있었던가?

역사를 좋아해서 사학과를 선택했는데,

취업 앞에서는 막막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꼈다.

이래가지고 일을 할 수 있겠나 싶었다.

몸쓰는 일부터 부딪혀보려는 의지도 없는데.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그냥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뒤적이고 있었다.

고등학생의 티를 벗지 않은, 어떻게 보면 미련이 남은 필자는

수험생 커뮤니티를 자주 배회했었다.

그러다 오X비라는 곳에서 필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글을 발견했다.


평가원 모의평가, 수능 세계사와 관련한 업무를 담당할 검토자를 모집한다는 글이었다.

필자가 사학과라는 타이틀을 활용하고 싶었던 분야이기도 하다.

다른 건 몰라도, 평가원 모의고사/수능 역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평가원 시험의 형식과 내용을 모방해 만든 시험지,

필자만의 학습법 공략을 수험생 커뮤니티에 게시해 나름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그 자신 있는 분야로 하나의 경력을 만들고 보수를 받는다고 하니,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지원서를 냈다.

이렇게 우연히 제3지대 교육에 입문하게 되었다.

필자가 검토진을 모집하기 전 보냈던 메일들이다. 당시의 필자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준다. 지원서를 쓸 때도 어떻게든 증명 자료를 만드려고 애썼다.

아래 링크는 필자가 우연히 봤던 실제 검토진 모집 글이다. 본래 2022년 당시의 글을 가져오려 했는데, 삭제된 관계로 2023년의 모집 글을 가져왔다. 내용은 2022년 모집글과 별반 차이가 없다.

https://orbi.kr/00062346891/%5B%EC%84%B8%EA%B3%84%EC%82%AC%5D%20%EA%B2%80%ED%86%A0%EC%9E%90%EB%A5%BC%20%EB%AA%A8%EC%A7%91%ED%95%A9%EB%8B%88%EB%8B%A4


당시 촬영한 서초동 일대 사무실의 모습, 노트북에 비친 시각은 오후 12:32분이다.

2022년 2월 9일,

처음으로 검토 업무를 하기 위해 출근했다.

장소는 서초동 일대의 사무실이었다.

필자 기억으론 1시 출근이었는데,

그보다 30분은 앞서서 도착한 것 같다.


사무실은 철문으로 굳게 잠겨 있어서

계단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더 오는 것이었다.

이 사람도 알고보니 검토진이었다.

'혼자 일하는 건 아니었구나.'라고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저자가 도착하셨다.


그때는 정황이 없어서

사무실을 찬찬히 둘러보지 못했다.

저자가 소속된 학원에 대해서도 금시초문인 상태였다.

그냥 내가 자신있는 분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던 것 같다.


1시, 일이 시작되었다.

두 분의 검토진이 더 사무실에 오셨다.

저자가 오셔서 간단한 업무 설명을 한 뒤, 매뉴얼 종이와 검토할 원고를 나눠주셨다.

피드백을 받기 전까지 자유롭게 검토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다. 그냥 읽다가 오류가 발견되는 지점만 잡아내면 된다.

오류는 단순 오타도 포함된다.

'정말 이게 일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쉬웠다.

그렇게 6시 무렵까지 원고를 검토하고, 저자에게 피드백을 드린 뒤 귀가했다.


귀가하기 전에, 저자가

한 번 더 검토 일정을 잡으려고 하는데 가능하냐고 물으셨다.

가능하다고 답했다.

필자 입장에선 일이 늘면 좋기 때문이다.

첫 검토를 진행했던 모습, 정작 이때에는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다. 원고를 검토할 때 교과서, 연계 교재를 참고했다. 여담이라면, 사진의 샤프는 필자가 수능을 쳤을 당시 받았다.

2022년 2월 18일,

두 번째 검토 업무를 위해 출근했다.

이때는 12시부터 업무를 시작한다고 해서 일찍 왔는데,

저자가 늦게 오셔서 1시간여를 기다렸다.

기다린 시간은 급여에 합산해준다고 하셔서 그러려니 넘어갔다.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저자가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사무실에 먼저 들어가라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사무실에 혼자 오도커니 있었는데,

그 틈을 노려 사무실에 무엇이 있는지를 구경했다.

그 과정에서 학원의 존재를 조금 더 알아가게 되었다.

사무실에 있었던 각종 문제집, 전공 서적, 모의고사 문제들

사무실을 요리조리 둘러보면서,

두 가지의 새로움을 알았다.


하나는, '철저함'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게

각종 문제집, 몇 개년치의 평가원 모의고사와 수능을 모아둔 종이 뭉치였다.

'저걸 다 분석해야 교재든 뭐든 개발할 수 있구나.'

'사교육은 저런 철저함이 있어야 살아남는구나.'

어렴풋이 알았던 순간이었다.


다른 하나는, '학문과 교육의 조화'였다.

사무실에는 두꺼운 생명과학, 철학 전공 서적들도 있었다.

아마 교재 집필을 위해 참고 자료로 활용되는 것으로 보였다.

수험생 입장에서는 교과서 내용을 암기하고, 연습 문제를 달달 풀면 그만이지만,

집필진 입장에서는 그것에 더해

교과서의 베이스가 되는 학문에 대해서도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집필진의 위치에 서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학문과 교육의 조화는 향후 필자가 집필진이 되면서 가장 고려했던 사항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 본 전공 서적들은

필자가 집필진으로서의 역량을 발현하기 위한 '원석', '영감'이었는지도 모른다.


학원 구조에 대해서도 한 가지의 특성을 알았다.

분명히 필자는 세계사 교재를 검토하기 위해 왔는데,

생명과학, 철학 서적이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사무실은 공용 사무실이었던 거다.

각 교과목 집필&검토진이 돌아가면서 사무실을 쓰는 것으로 보였다.

보통 일반 회사는 각 직급의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일하는 풍경인 걸 생각하면,

학원의 일하는 풍경은 그와 제법 많이 다르다.

비유하자면, 학원은 일종의 '봉건 사회(봉건제)'이다.

이 부분은 다른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후속 글 바로 가기

https://brunch.co.kr/@charlemagnekim/40


확실히 두 번째로 사무실에 왔을 때는

처음 사무실에 왔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였다.

제3지대 교육이라는 분야에 더 관심이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저자와 다른 검토진이 사무실에 왔고,

첫 번째 업무 때와 같은 방식으로 검토를 진행했다.

역시 6시 무렵에 일이 끝나고, 귀가했다.

두 번째 검토 업무 당시 받은 매뉴얼과 교재 원고의 모습
두 번째 검토 업무를 진행했던 모습

우연히 하게 된 검토 업무는

필자에게 그간 전혀 몰랐던 사교육이라는 분야를 알게 해줬고,

교재 집필 및 검토라는 제3지대 교육으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우연은 후일 필자가 제3지대 교육의 바깥에서 뿌리로 정착하는 '필연'이 되었다.


그런데 고마운 경험을 안겨준 이 업무는 단발성에 그치고 말았다.

몇 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맞닥뜨리는 과정도 사회생활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 장과 이어지는 다음 장에서는

이 업무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업무를 하기 전 확인해야 할 '체크리스트(Ex. 근로기준법)'를 어떻게 설정했는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keyword
이전 01화제3지대 교육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