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지대 역사교육 Note: 다시, 초창기 #1
2023년 1~2월,
신입 집필진으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넘쳤다.
필자가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이.
검토진 때처럼, 집필진 때도 수월히 잘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집필진의 영역에서 정점을 찍는 여정은
근 1년(2022~2023)간 필자가 치열하게
제3지대 교육의 바깥에서 중심까지 달려온 여정에
상응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길고 험난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여정의 초입에 들어온 것뿐인데
지난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자신감으로
새로운 여정도 어렵지 않겠다고
'과소평가'한 것이다.
동시에 필자의 자신감은 '과대'했다.
더닝 크루거 효과는 제시된 사진으로 많이 접해봤을 것이다.
이 효과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이겠다.
지식을 조금 알게 되면, '나 이제 이거 알아! 마음껏 설명해 볼 테야!'라며
자신감이 넘치게 된다.
그런데 지식의 깊이를 탐험할수록, '생각보다 모르는 게 많은데?'라며
자신감이 떨어지게 된다.
떨어진 자신감은 지식이 '숙성'되면서 올라가게 된다.
필자는 2023년 초에 우매함의 봉우리에 있었고,
2023년 내내 절망의 계곡에 머물다가,
2024년 초에 깨달음의 비탈길을 올라가면서
휴직을 내는 2024년 8월까지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이르렀다.
이것이 필자가 집필진의 영역에 있으면서 경험한 '더닝 크루거 효과'이다.
'다시, 초창기'라는 부제목이 붙는 글들에서는
우매함의 봉우리~절망의 계곡 과정을 다룬다.
2023년 1월 3째주(평일 기준: 1.16-1.20),
검토진에서 집필진으로의 전환이 공식으로 이루어진 주였다.
1월 16일은 검토진으로서의 마지막 업무였다.
이렇게 반년의 검토진 생활이 마무리되었다.
필자 기억이 맞다면,
이때까지도 집필진 모집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날도 면접이 진행됐던 것 같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1월 20일,
집필진 계약서를 쓰기 위해
같은 사무실로 '첫 출근'을 했다.
기분이 묘했다.
검토진 계약서는 사무실에서 썼었다.
그런데 집필진 계약서는 사무실에서 쓰지 않았다.
사무실에 팀장님과 필자를 포함한 합격자가 모인 뒤
10분 거리에 있는 학원 본원으로 향했다.
'학원 본원?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생각할 독자가 많을 것이다.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학원 본원은 학원을 경영하는 '일반 직장인'들의 공간이다.
학생과 관련된 업무(수업, 교재 개발)를 하는 사람들은 '분원'에서 일한다.
즉, 필자가 검토 및 집필 업무를 했던 사무실은 분원인 셈이다.
그래서 분원에 소속된 사람들은 본원에 갈 일이 거의 없다.
팀장님처럼 분원의 지도부가 되어야 본원 접촉이 빈번해진다.
앞선 글에서 학원은 일종의 봉건 사회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같은 특성 때문이다.
학원 본원은 재무 분야(급여)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 이외의 분야는 분원이 알아서 결정하고 집행한다.
앞선 글 바로 가기
https://brunch.co.kr/@charlemagnekim/31
봉건 사회는 주종제와 장원제가 그 핵심을 이룬다.
주종제는 '영주들 간의 이해관계'이다.
권력자라도 권력의 크기는 제각기 다를 것이다.
마치 대통령과 시장의 차이, 시장과 시의원의 차이처럼.
영주도 상위 영주가 있고, 하위 영주가 있다.
하위 영주는 상위 영주에 충성을 맹세하고
군사적 의무를 제공하겠다 약속하면,
상위 영주는 그에 따른 봉토를 수여한다.
그렇지만 상위 영주나 하위 영주나 '같은 권력자'이다.
단지 권력자 계급 내 소유한 권력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주종제이다.
주종제를 학원 본원과 분원의 관계에 적용해보자.
학원 본원과 분원은 모두 '영주'이다.
구분을 하면, 학원 본원은 상위 영주, 학원 분원이 하위 영주이다.
학원 분원은 학원 본원의 성장을 위한 업무를 하겠다 약속하고,
학원 본원은 그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한다.
장원제는 '영주와 피지배민 간의 이해관계'이다.
따라서 주종제와 달리 '지배와 예속'이라는 특성이 발생한다.
주종제에서 상위 영주와 하위 영주 간의 계약 관계가 성립되면,
봉토를 수여받는다고 말했다.
이 봉토는 오로지 영주만의 공간이다.
상위 영주가 하위 영주에게 봉토를 준 순간 이후부터는,
상위 영주가 하위 영주의 봉토 운영에 대해 어떤 간섭도 할 수 없다.
이를 '불입권(不入權, Immunity)'이라 부른다.
영주들이 수여받은 봉토는 곧 장원을 이루게 된다.
장원은 '영주가 주인인 마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러면 장원에 사는 보통 사람들은 영주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된다.
영주가 뭘 하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따라야 한다.
이렇게 영주는 장원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장원의 사람들은 영주에게 예속된다.
장원제는 학원 분원 내 관계에 적용할 수 있다.
학원 분원이라는 장원의 주인은 팀장님이다.
그리고 팀장님 밑으로 있는 집필진은 업무를 하달받으면 수행해야 된다.
그 밑으로는 검토진이 있다.
검토진을 운영하는 것은 학원 본원이 간섭하지 않고,
역시 학원 분원이 재량껏 한다. 급여만 학원 본원이 지급한다.
이처럼 필자가 소속된 학원은
학원 본원이 모든 걸 책임지는 '중앙집권'의 방식을 취하지 않고,
학원 분원에 일정한 권한과 업무를 위임하는 '지방분권'의 방식을 취한다.
학원을 봉건 사회라 비유한 이유를 확실히 알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학원 본원에서 집필진 계약서를 체결할 때,
'마치 봉건 사회 같군.'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계약서를 쓰고 사무실로 돌아온 뒤,
기존 집필진 분들이 일시에 인사를 건넸다.
정신없이 일하고 계셨다.
필자와 다른 합격자는 앉아서 기다렸다.
한 30분쯤 기다렸을까,
회의실로 들어가서 정식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다.
집필진 업무와 관련한 제반 사항을 안내받았다.
끝나니 어느덧 점심 시간 무렵이 되어 있었다.
원래 집필진들과 첫 식사를 하려 했지만, 사정상 그러지 못해
다음에 식사를 사주겠다 약속하고 귀가했다.
어떤 회사가 제대로 됐는지를 보는 방법 중 하나가
'신입 교육'이다.
아직 회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 신입을 바로 실전 업무에 투입하면,
당연히 사고가 난다.
그래서 신입이 들어온 회사가 이런 곳이구나를,
회사에서 하는 일이 이런 것이구나를,
적응하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 시간이 바로 신입 교육이다.
신입 집필진의 교육 기간은 '2개월'이었다. 긴 편이다.
분명히 필자가 소속된 곳은, 엄밀히 따지면 회사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학원이었다.
'학원이 커봤자 기업이겠어?'라는 편견이 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교육 기간을 나름 규모 있는 회사들처럼 잡은 걸 보니,
'이 길로 잘 들어왔구나.'라고 생각했고, 좀 놀라기도 했다.
편견이 깨져서 놀랐다.
여담이라면, 실제로 그 학원은 기업 규모로 '중견기업'에 속한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합쳐도 우리나라 기업 비율의 10%도 안 된다.
중견기업은 무시할 수 없는 기업이며, 성장 동력이 넘치는 기업이다.
교육은 주로 부팀장님과 진행했다.
부팀장님은 교육에서 형식과 실습을 중시하셨다.
집필진의 주요 업무는
'평가원 시험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시험지를
제작'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용도 잘 담아야겠지만, 형식이 기본으로 지켜져야 한다.
오탈자 없는 건 당연한 거고,
'이건 누가 봐도 평가원 문제다.'라는 인상을 주는 문제 형식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부팀장님은 이런 '형식적인 부분'을 중점적으로
교육하셨다.
필자도 형식을 중시하는지라, 정말 정통하게
잘 배웠던 것 같다.
뭘 만드는 건 '두 손으로 직접' 해야
그 원리를 비로소 체득하게 된다.
이론을 배우는 건 머리로 익히고 외우면 끝이지만,
실습은 다르다. 머리와 함께 손도 배워야 한다.
부팀장님은 교육에서 '시연'만을 행했고,
나머지는 필자가 직접 시연대로 따라해야 했다.
실습을 할 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필자는 분명히 검토진 경력의 '배경'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배경이 한순간에 무색해졌다.
앞으로 이 말고도 배울 게 많고, 또 이걸 업무로 한다 생각하니
집필진 모집에 합격했을 당시의 자신감은 부풀려졌음을 느끼게 되었다.
실습을 하는 순간순간은 쉽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이 실습이 있었기 때문에
더닝 크루거 효과에서 말하는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이르는 자양분이 되었다.
되게 흥미롭기도 했다.
검토진의 위치에 있으면서 문항공모에 도전할 때,
'한계에 부딪혔던 부분'이 완벽하게 해소되는 지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문항에 내용을 담기도 어려웠는데, 형식도 구현하기가 어려웠었다.
그 어려움이 깨달음으로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팀장님도 교육을 진행하셨다.
교육을 받을 당시에는 주 1회 출근을 했었는데,
그 출근 시간에 부팀장님과의 교육 시간,
팀장님과의 교육 시간이 나눠졌다.
팀장님과의 교육은 부팀장님과의 교육이 끝난 시간대,
즉, 저녁 시간대에 이루어졌다.
팀장님의 교육은 주로 이론교육이었다.
지원서에서 물어봤던 '평가원 모의평가/수능 역사의 출제 동향',
'평가원 모의평가/수능 역사에 담긴 내용' 이런 것을 다뤘다.
이 역시도 재밌었다.
(당연하겠지만) 팀장님은 역사교육과 출신이시다.
교육을 배우신 분답게, 교육의 원리를 정말 잘 아셨다.
교육자의 면모, 그리고 특유의 카리스마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검토진에 있었을 적에는,
팀장님과 밀접히 접촉하거나 대화했던 적이 없었는데,
같은 집필진으로서 팀장님을 접하게 되니
'이래서 팀장님이 되셨구나. 이래서 사람을 끌어모았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존경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한 하나의 또 중요한 얘기가 있는데,
그것은 이후 글에서 풀어보겠다.
후속 글 바로 가기
https://brunch.co.kr/@charlemagnekim/53
역시 필자를 설레게 했던 부분은
집필진으로서 얻게 된 '권리'가 아닌가 싶다.
급여도 검토진 때보다 더 많이 받았고,
학원과 관련한 각종 정보,
교육에 필요한 넓고도 깊은 학문(전공 서적)에
접근할 수 있었고,
필자 개인 근무 공간을 부여받았다.
출판된 교재의 실물도 저자 몫으로 받을 수 있었다.
검토진 때는 받지 못했다.
이 사실도 설렘의 큰 부분이었다.
'이렇게 대우해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그렇게 대우한 것에는
그만한 의무가 따른다는 사실을 자연히 알았지만,
역사학 전공자의 대접이 좋지 않은 현실에서
그리고 학자적 기질이 다분한 필자에게
그런 대우는 인생 처음으로 받아본 것이다.
'여기야말로 필자 능력을 꽃피울 곳이군.'이라고
생각했다.
달리 말하면, 사학과 안에서의 필자는 무력하다.
필자 대학에서의 사학과는 힘없는 약자이고,
사학과 내에서도 교수 권력으로 듣고 싶었던 전공 수업도 없애버리고,
교육과정도 휙휙 바꾸는 데다가,
역사학에 열의가 없는 동기들의 집합을 이룬다.
거기서 필자는 그저 이방인 신세에 불과하다.
그 불만스러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메울 곳이
필자를 모셔주는 학원이었다.
제3지대 교육을 향한 필자의 여정은
현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여정이기도 했다.
제3지대 교육의 중심으로 입성하여
처음 바라본 광경은 '신세계'였다.
그간 살면서 볼 수 없었던 놀라움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놀라움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놀라움은 익숙함을 의심케 한다.
'그간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나?'라는 충격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래서 '앎'에는 겸손해야 하는 것 같다.
알면 알수록, 몰랐던 것들이 속속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
더닝 크루거 효과에서 말하는 '우매함의 봉우리'를
경계해야 한다.
이제 필자는 우매함의 봉우리에서 내려왔다.
그 뒤 마주한 것은 절망의 계곡이었다.
험난한 여정의 연속이었다.
제3지대 교육의 중심을 '보기만 했던' 사람이 아닌,
제3지대 교육의 중심에 뿌리를 내리려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무엇이 힘들었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이어서 얘기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