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잠들지 않는 밤이어도 좋다
중년이 되고 나서 긴 밤이 유독 잦아졌다.
하루가 끝나고 몸은 분명 지쳤는데 마음은 쉽게 잠들지 않는다.
창밖의 어둠처럼 방 안도 깊고 조용하다.
낮 동안 쌓였던 소리와 사람들
해야 할 일들과 지나간 감정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는 오롯이 ‘나’만 남는다.
그 순간이 어쩌면 가장 솔직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함이 늘 편안한 것은 아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베개를 몇 번이나 고쳐보고 이불을 다시 끌어당겨도 잠은 쉽게 오지 않는다.
억지로 눈을 감아보지만 오히려 머릿속 생각들은 또렷해진다.
오늘 했던 말들, 하지 못했던 말들, 오래된 기억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마치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별것 아닌 장면 하나에도 의미를 붙이고
이미 끝난 관계를 다시 꺼내 되짚고
가정하지 않아도 될 상황까지 만들어내며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그렇게 밤은 점점 더 길어진다.
예전에는 이런 밤이 오면 잠을 억지로 청하려 애썼다.
양을 세어보기도 하고 눈을 꼭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잠을 자야 한다는 마음이 클수록 잠은 더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생각을 바꿨다.
"그래, 오늘은 잠들지 않는 밤이어도 좋다."
그날 이후 나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을 억지로 이겨내려 하지 않는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켠다.
은은한 불빛이 방 한편을 따뜻하게 채운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생각보다 위로가 된다.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내 마음은 조금씩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내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 다른 세계 속으로 스며들면서
조금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생각들은 서서히 힘을 잃는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른 채
한 장, 또 한 장 넘기다 보면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활자가 어른거리고 문장이 흐려지는 그 순간
나는 비로소 편안하게 나를 놓아버린다.
그때가 되면 조용히 책을 덮는다.
이제 나는 긴 밤을 마주했을 때 애쓰지 않는다.
억지로 잠을 청하지도 꼬인 생각을 억지로 풀려하지도 않는다.
그저 흐르는 대로 졸리면 자고 깨어나면 깨어 있는 대로 내버려 둔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내 안의 불면은 책의 온기로 다독여진다.
중년이 되어 얻은 가장 큰 위안은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몸소 배운 것이다.
불면 덕분에 책과 더 가까워진 이 고요한 밤은
소모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채우는 시간이다.
잠을 잃은 대신 나를 찾은 이 역설적인 선물을 나는 이제 기꺼이 그리고 소중히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