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자연과 정치 (14)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하는 비행기는 이륙 후 한 시간 뒤 아르헨티나 국경에 도착한다. 이는 비행기 창문으로 바라본 풍경의 변화로 확실히 알 수 있다. 산티아고를 출발해 계속 이어지던 안데스 산맥은, 아르헨티나로 들어서자 삽시간에 대평원으로 바뀐다. 이 평원지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항에 이륙할 때까지 계속된다.
대평원의 규모를 보아하니, 팜파스의 목축업과 농업으로 아르헨티나가 19세기 세계 5위 경제대국에 올랐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게 확실하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로 향했다. 부국이었던 과거 영광의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있다. 구의사당 건물은 이태리에서 직수입한 대리석으로 지어졌고, 부유층이 거주하는 구역에서는 신문이 배관처럼 연결된 유리관을 통해 배달되었다고 하니, 그 부의 규모를 알만하다.
구의사당과 주변 관공서 건물을 돌아보고, 엘 아테네오(El Ateneo) 서점에 들렀다. 유명 극장을 개조해 만든 이 서점은 종종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 라는 안내문과 함께 대한민국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스페인어 판본으로 만날 수 있다.
도시 중심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도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1936년 제작했다고 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남북에 뻗어있는 대로는 왕복 24차선에 이르는데, 도시의 거대함을 보여주는 척도이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우승 후, 300만 인파가 오벨리스크 대로에 집결해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 팀의 우승을 축하하는 장면이 송출되며 이곳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마라도나와 메시라는 걸출한 축구영웅을 배출한 나라답게 곳곳에서 두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정부청사가 위치한 5월 광장에도 마라도나 모자이크가 있다.
저녁에는 탱고 공연을 관람했다. 탱고의 나라답게, 매일 다양한 공연이 성황리로 펼쳐진다. 동네 술집 수준의 레스토랑에서도 탱고 공연을 볼 수 있고, 소수의 관람객을 위한 최고가의 탱고 공연도 존재한다.
최고가 공연을 보려고 했지만, 이건 돈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턱시도를 갖춰 입어야 볼 수 있단다. 하다못해 셔츠와 자켓, 구두정도는 있어야 입장이 가능하다. 장기 여행에서 ‘구두와 자켓’은 어불성설이니, 그 다음 급의 공연을 관람할 수밖에 없다.
全아르헨티나 4위를 했다는 만지온 탕고(Mansion Tango) 공연팀의 수준은 관람객이 자켓만 갖추지 않았을 뿐이지, 무척 훌륭하다.
탱고 음악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변두리 음악에서 출발했지만, 쿠바음악의 뿌리를 부정할 수 없다. 쿠바 아바네라(habanera) 춤곡의 4분의 4박자 당김음에서 탱고 음악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쿠바음악이 아랍-이베로-아프로 문화가 조화롭게 뒤섞인 음악이고, 탱고 춤이 파리의 탱고 열풍 이후 세련화되어 다시 역수입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탱고 공연은 진정한 하이브리드 공연인 것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 불린다는데, 도시의 아름다움이나, 문화적 수준이 결코 파리에 뒤지지 않는다. 사실, ○○의 파리라는 표현은 그 도시에 대한 실례라 생각한다. 부쿠레슈티는 동유럽의 파리, 사이공은 동양의 파리라고 한다는데, 각각의 매력이 있는 도시가 굳이 왜 파리의 아류로 대접받아야 하는지 의문이다. 하얼빈을 동방의 모스크로, 프라하를 북쪽의 로마라고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