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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 Jan 25. 2022

사주에 인복이 많다더니

06. 나의 지인 둘

  몇 해전, 사주를 보았던 적이 있다. 총각 도사님은 내게 인복이 참 좋다며 주변에 해가 되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말을 해주셨다. 그러고 보니 항상 내 주위에는 좋은 기운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인복’은 바다 건너 몰타에 나와 함께 왔었나 보다.


  집을 계약한 날, 우연히 만난 이웃집 그녀와 한국어로 대화하는 도중에 그녀가 영어를 아주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호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서 생활하면 한국인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언니는 믿어도 되겠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언니와는 바로 다음날, 아이스 라테를 마시며 동네 산책을 했다.(그것이 시작이 되어 우리는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산책을 즐겼다.) 언니가 하는 일과 몰타에 오게 된 이유, 한국계 호주인으로서의 생활에 관란 이야기를 들으니 언니는 나와는 한참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보다 훨씬 한식을 사랑하고 정이 많았다. 그래서 언니가 너무 좋았다. 언니랑 있으면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언니와는 한식을 요리해서 나누어 먹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 우리는 이웃사촌이었다. 하루는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내가 언니를 초대하고, 또 하루는 언니가 김치찌개를 끓였다며 나를 초대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언니는 요리를 정말 잘했다. 나중에는 짜장면, 보쌈, 직접 담근 김치, 월남쌈까지 나를 위해 만들어주었다. 우리가 각 자의 집에 번갈아 초대를 받아 맛있는 것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난 뒤에 작별하는 모습은 늘 웃음을 자아냈다. “갈게요.”, “갈게”라는 말을 하고 현관을 나와 왼쪽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세 걸음만 걸으면 각자의 집이 나온다. ‘조심히 가’라는 말은 우리의 작별인사에는 등장하기 어려운  대사였다.


  한두 달 정도 함께 살았던 플랫 메이트 친구, 동생과 ‘이태원 클라쓰’를 정주행 했던 것처럼 언니와는 ‘인간 수업’과 ‘응답하라 1994’를 정주행 했다. 음성은 한국어에 자막은 영어였다. 가끔 나는 언니에게 자막 속 영어단어를 묻고, 언니는 나에게 어려운 한국어 단어나 사투리를 물었다. 우리가 넷플릭스를 볼 때는 늘 식초 맛의 감자칩과 스웨덴산 과일맥주가 함께 했다. 한 봉지, 두 봉지 입천장은 까지고, 맥주에 취해 드라마 내용이 기억나지 않은 날이 많았지만,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나의 영어수업이 끝나고 언니의 이른 퇴근이 있는 날에는 배경이 안주가 되는 동네 칵테일 바에서 인생 이야기, 연애 이야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메뉴가 몇 가지 안 되는 파스타 맛집에서 길거리 공연을 보며 여유로움을 함께 누렸다. 언니는 키도 크고, 날씬하고 세련된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어를 쓸 때면 이따금씩 잘못된 단어 선택으로 귀여워지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언니가 내게 “이 언니는 너에 비해 너무 낡아서 안 될 거야.”라고 했는데 나는 “우리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요.”라고 대답하며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언니는 수영도 잘하고 승마도 잘했다. 나는 둘 다 못하지만, 겁이 없다. 그래서 언니를 따라 구명조끼에 의존한 채, 바다수영을 하기도 하고 말발굽 소리 하나에 멍 하나씩 들어가며 언니를 쫓아갔다.(승마 이야기는 후에 따로 풀어보려 한다.) 호주에 대한 나의 편견이었겠지만, ‘드넓은 자연에서 자라면 물이랑 산이랑 가까워지는구나!’ 언니를 보며 생각했다.


  언니에게 남자 친구가 생기고, 휴가 전에 일도 바빠질 무렵 나에게 새로운 지인이 생겼다.(인복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녀는 언니와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똑같은 나보다 5살 어린 동생이었다. 20살에 혼자서 남미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용기 있고 똑 부러지는 동생은 나와 같은 어학원에 다녔다.


  다섯 살이라는 꽤 큰 나이차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배려심도 강한 나의 동생은 공무원이었다. 즉 나처럼 휴직을 내고 몰타에 온 것인데 나보다 영어를 잘했다. 유학원 정기모임에서 처음 본 우리는 2차를 가지 않고 각 자의 집으로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당시 새집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나는 동네방네 만나는 사람에게 집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동생은 나의 말을 듣고 집에 놀러 오겠다고 했고 며칠 뒤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나의 집을 둘러본 후에 우리는 전통 몰타 코스 요리를 먹으러 갔다. 엄청 맛있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특색 있는 음식과 와인, 친절한 웨이터, 사랑스러운 동생까지 너무 완벽한 저녁 식사였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함께 몰타 맛집 탐방을 다녔다. 슬프게도 몰타에는 맛집이 별로 없다는 결론을 얻었지만, 동생과 함께 샌들을 신고 골목골목을 거닐었던 기억은 맛집 찾기 이상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동생과 나는 흥이 참 많았다. ‘술 없이 술 취한 사람보다 잘 놀기 대회’가 있다면 우리가 분명 1등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에겐 음악에 반응하는 DNA가 있는 게 분명했다. 펍에서 클럽에서 홈파티에서 비치파티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절을 움직였다.(이 이야기도 나중에 따로 풀어보려 한다.) 어느 날은 버스로 족히 열 정거장은 될 듯한 거리를 케이팝을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걷기도 하였다.(세대 차이가 나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지만, 나의 어린 정신 연령 덕에 그녀의 선곡은 안성맞춤이었다.)


  나보다 몇 달 일찍 온 동생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마음이 따뜻한 동생은 자신의 친구들을 내게 소개해주었다. 콜롬비아인, 홍콩인 커플 친구부터 헝가리인 친구까지 동생 덕분에 함께 차를 빌려 여행을 하기도 하고 파티에 초대받아 신나는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동생은 나의 생일도 챙겨주고 생각이나 의견에 적극 공감하며 귀 기울여주었다. 그래서 동생이 없었더라면 아쉬웠을 일이 동생의 존재 덕분에 추억이 되었다.


  동생과 나는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학원에서 배운 표현, 팟캐스트에서 배운 표현 등을 서로 공유했다. 주로 슬리에마에 위치한 스타벅스 테라스에서 공부를 했는데 우리가 서로에게 자주 쓰던 말은 ‘Im rooting for you’였다. 이는 ‘cheer up’이 위로의 응원이라는 것을 알고 찾은 ‘일상적인 영어 응원 구문’인 셈이었다. 한 번은 ‘속상하다’라는 감정적인 말을 단순히 ‘disappointed’라고 이성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너무 아쉬워서 동생과 함께 열심히 구글링도 하고 공부 영상도 찾아가며 대체 단어를 찾아보기도 했다. 결국 ‘bummed out’이라는 단어를 찾은 나와 동생은 한동안 유행어처럼 ‘bummed out’을 외치고 다녔다.


  동생과 나는 남자 취향이 달랐다. 동생이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내가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다. 동생의 사랑스러운 외모에 딱 어울리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술 한잔을 기울이던 날, 동생이 갑자기 “언니 저기 봐요!, 미남이에요.”라고 귓속말로 시선의 방향을 설명했는데 내 시야에는 미남이 보이지 않아 한참을 “어디? 저기?”했더랬다. 반면에 내가 멋있다고 생각한 이성을 본 동생이 고개를 갸우뚱했던 적도 있다. 이런 일과는 별개로 동생은 자기가 떠나기 전에 내게 많은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스타벅스 다음으로 훈남 아르바이트생이 근무하던 카페에서 영어공부를 자주 했는데(훈남 아르바이트생 때문에 자주 갔던 것은 아니다. 정말 아니다. 바로 옆이 쇼핑몰이라서 위치도 좋았다.) 말 걸어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나와 달리 용기 있게 아르바이트생에게 “나는 곧 떠나지만, 여기 내 친구는 남아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할 예정이야.”라고 말을 건넸고 아르바이트생은 프랑스에서 왔고 영어공부를 위해 왔다고 친절히 답해주었다. 동생 덕분에 친구가 한 명 더 생기나 기대했는데 그 뒤로 그는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간 것인지 수다 떨다 해고당한 것인지 다시는 몰타에서 볼 수가 없었다.


  이름이 같은 언니와 동생과 함께 밤은 짧다 외치며 밤의 끝을 여러 번 잡던 한여름을 보내고 동생의 생일까지 챙겨주니 가속도가 붙은 시간은 나를 이별의 순간으로 데리고 왔다. 그곳에는 찐한 포옹 후, 공항으로 들어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내가 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동생의 부재를 느끼던 그때의 나의 마음과 5개월 뒤, 내가 떠날 때 공항에서 나를 배웅해주던 언니의 마음은 같았을까? 나의 몰타 생활을 곁에서 챙겨주고 지지해주던 소중한 두 사람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녀들이 있어 항상 든든했고 타지에서도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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