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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Oct 05. 2023

[단편] 비로소, 이별 - 후편

시계를 봤다. 1시.      


 “아버님, 지금 나서면 될 것 같네요. 찬이 올 시간요.”      


서둘러 외투를 입고 나란히 그와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그도 한 걸음 뒤에 서있었다. 중간에 타는 사람은 없었다.      


 “이 길로 쭉 올라가면 돼요. 횡단보도가 한번 밖에 없어요. 그런데 길이 좁아 갓길에 주차된 차 때문에 조금 위험해서 저학년은 등하교 때 부모들이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애들이 워낙 작아 차 사이에서 나오면 안보여요. 그래서 사고도 종종 나고.”      


뒷짐을 지고 나를 따라오던 그는 내 말에 가만히 좁은 길에 줄지어 주차된 차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렇게 뒷짐을 진 익숙한 뒷모습. 왜소하지만 다부진 등과 손. 20여 년 전, 2004년 처음 얼굴을 대면했던 날도 그는 저 모습, 저 표정 그대로였다.      


 “아버님, 저기가 찬이 교실이에요.”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서 저학년 건물 일층 좌측 첫 번째 창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손끝이 머문 자리로 시선을 옮긴 그에게 “외부인 출입은 금지됐지만, 아버님은 들어가서 보셔도 되겠네요.”라고 말하자 그는 특혜를 얻은 듯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뒷짐을 진손은 그대로였지만, 흥에 겨운 발걸음은 금방 잰걸음을 하였기에 나는 내가 퍽 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친구들과 오늘 잘 놀고, 얌전히 잘 앉아서 선생님 말씀 듣고 있어야 할 텐데.’      


평소에는 하지 않는 괜한 걱정을 하고 있던 중, 신이 난 찬이가 친한 친구 둘과 실내화를 벗어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발견하고서는 손을 흔들고 크게 “엄마!”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친구 둘도 따라 뛰어왔다.


뒷짐을 진 그도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진귀한 구경을 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였다.      


 “오늘은 연준이랑 태건이 반이 같이 끝났어. 집까지 같이 갈래.”      


여덟 살 아이들은 아직 사내아이보다는 아기태가 난다. 쉬지 않고 나름의 화젯거리를 재잘거리는 모양새가 병아리 새끼들 마냥 귀엽다.


찬이와 친구 둘이 앞서 걷고, 그 뒤를 그와 나는 조용히 따라갔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는 여전히 뒷짐을 진 채였다. 굵고 거친 저 손, 잡을 엄두는 나지 않지만 온기가 여전할까 궁금했다.      


 “아버님, 오셨다고 얘기를 해줄 수 없네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넉넉한 웃음 짓더니 아이 친구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으셨다.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듯 그의 손길에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바람에 날렸다. 꺄르르, 간지러운 듯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바람에 날렸다.      


집으로 들어온 아이는 의례하던 대로 손을 씻고, 집을 나서기 전에 미리 챙겨두었던 초코빵과 우유를 먹으며 좋아하는 만화책을 봤다.


아이는 앉아있다 일어났다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그는 계속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버님, 좀 앉으세요.”

 “그래, 그러자.”      


자리에 앉은 그는 책이 아닌 책을 보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기 시작했다.      


 “좀 쉬세요. 조금 있으면 오빠도 퇴근할거예요.”      


그는 당신 아들 퇴근소식은 듣지 못한 듯 말했다.      


 “내가 일하느라 얘를 많이 못 봤어. 이 귀여운 애를, 이 귀한 애를, 더 많이 안아주고 좋아한다는 거 손잡고 가서 다 사줄걸. 얘가 날 기억할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아무래도 잊어버리겠지?”


 “제가 사진 자주 보여줄게요. 할아버지 이름도 종종 써보라고 할게요.”


 “그래, 그래주면 고맙지.”      


언젠가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에서 본 적이 있다. 멕시코 ‘죽은 자의 날’에 관한 것인데, 산 자가 죽은 이를 기억해주면 망자는 그들의 세상에서 행복하게 축제를 즐기듯 살 수 있다고.


영화에 따르면 산 자가 기억해주는 한 그들은 죽은 게 죽은 게 아니었다. 이승보다 신나는 그들의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다고 한 그 영화를 우리 가족 모두 아주 재밌게 봤었다.       


 “오빠 왔나 봐요.”     


 “왔어? 배고프지, 얼른 밥 먹자.” 라고 말은 했지만 당신 아버지가 집에 오셨어, 라는 얘기는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찬이 옆에 앉은 그를 보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가만히 다가와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고생했어. 그래도 사람은 바빠야 돼. 잘 하고 있는 거야. 니가 참 자랑스럽다. 늘 자랑스러웠어, 고마워.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라고 말하는 음성이 들렸다.      


남편도 들으면 좋을 텐데. 아쉬웠다. 녹음을 할 수도 없으니, 정말 아쉬웠다. 그는 살아생전 며느리인 나에게는 고마움을 말로, 용돈으로 전하곤 하셨지만, 자식들에게는 쑥스러워 어떤 표현도 하지 않았다.


 “아쉽네요. 오빠가 들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죽고 보니 좋은 게 몇 가지 있다.”      


아마 실컷 표현한 본인의 고백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네, 아버님. 죽어야 아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라는 내 생각도 전해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밥을 먹고 산책을 나설 때도 그는 우릴 따라 나섰다. 남편과 아이가 저만치 앞서 경쟁하듯 달리기를 하면 그와 나는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님, 언제 가세요?”


 “넌, 둘째 생각은 없냐?”


 “네, 뭐 아직은. 영 낳지 말아야지는 아닌데, 또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 알아서 잘 하겠지.”      


살아서 그는 한 번도 둘째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가시기 전에 작정한 듯 모조리 표현하고, 궁금한 건 다 물어볼 생각이신 걸까? 아들과 놀고 있는 손자의 모습이 조금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편하게 가시게 답을 시원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으니.       


 “혹시 계획이 생기면 산소에 갈 때 알려드릴게요. 그럼, 태몽으로 답을 주세요.”


 “그래, 그럴 수 있으면 그러마.”


 “아버님, 근데 언제 가세요? 가보셔야 하지 않아요? 49재할 때 그때 가실 거예요?”


 “아니, 아니다. 뭐 하러. 찬이도 봤고. 가야 지, 찬이 자는 거 보고 갈 거다.”


 “더 계셔도 되요. 49일까지는 괜찮지 않을까요?”


 “아냐, 갈 사람은 가야지. 뭐 하러 막바지까지 있어. 잘 살아라.”     


가로등이 켜져 있지만 이미 오래된 듯 어슴푸레한 빛이 어둠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었다.


믿는 망자와 함께 걸으니 어둠이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묘한 안도감, 안정감이 이 밤을 깊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버님, 저도 빽이 하나 생긴 거 같네요. 도착하시면 태몽도 태몽이지만, 저도 로또 번호 좀 불러주세요. 오늘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잘게요.”


 “저도 참 별 소리 다한다.”


 “많이 컸죠?”


 “그러게 말이다.”


 “더 많이 클 거예요. 제가 잘 키울게요. 오빠도 저도, 더 열심히 살 거예요. 아마 지금껏 보신 것보다 좋은 날 더 많을 거예요. 정말 열심히, 많이 웃으면서 살 작정이에요. 그러니까 저희 걱정은 하지 마세요. 편히 가세요. 모쪼록 재미있게 지내세요.”


 “고맙다, 너한테는 고마운 게 참 많아.”      


가시기 전에 미역국이나 끓여드리자 싶어 얼른 일어났다. 가스레인지 아래 서랍장을 열어보니 마침 마른 미역이 있다.


미역을 정수기 물을 받아 불리는 동안 채끝살을 꺼내 듬성듬성 자른 뒤, 혹시나 해서 마늘은 빼고 밑간을 해서 볶았다.


상을 치르는 동안, 남편 몸이 축 난거 같아 구워줄려고 큰 맘 먹고 산 구이용 소고기였다.


고기 볶는 냄새에 아이와 남편이 모두 부엌으로 왔다. 이 밤에 뭐하냐는 뜻이다.


먹고 싶어서, 라는 말에 임신했냐는 농담 같은 핀잔이 돌아왔다. 아랑곳하지 않고 푹 끓여서 한 그릇 가득 떠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드세요, 아버님. 좋아하시잖아요.”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힘든 노동으로 생을 부득부득 이어온 그는 고기를 참 좋아했다. 아내가 끓인 미역국은 한술도 뜨지 않았다. 빠듯한 살림에 고기는 든 듯 만 듯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만난 나는 항상 미역국을 끓일 때 고기 반, 미역 반이었다. 결혼 후 그의 첫 생일은 며느리인 내가 미역국을 끓였고, 그는 아주 좋아했었다.


더욱이 오늘은 국거리가 없어 급한 대로 비싼 채끝으로 끓였더니 더 연하고 맛있다. 비싼 구이용으로 끓인 걸 알면 심기가 조금 불편하실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오늘은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아시겠지.  

    

 “맛있다. 고기 맛 참 좋다.”      

 “참, 아버님 돌아가시던 날, 오빠가 새벽에 꿈을 꿨대요.”      


자꾸만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꿈. 찾아도 찾아도 자꾸만 잃어버리는 꿈. 아버지를 밤새 그렇게 꿈에서 찾아다녔다고 했었다.


하룻밤 수도 없이 아버지를 잃어버린 사십이 넘은 중년의 아들은 잠에서 깨서도 석연찮은 표정으로 불안한 꿈 이야기를 하며 출근 준비를 하는데 큰시누에게 전화가 왔다. 간호사에게 연락을 받은 것이다.     


꿈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을까? 그는.      


 “이제 가마.”


 “어디로 가세요?”


 “알아서 뭐하게, 산 사람이 알아서 안 되는 길 아니냐.”


 “그러네요. 아버님, 배웅 못 해드려요. 조심히 가세요.”


 “그래, 그게 어디라고 배웅해. 괜찮다.”


 “도착하시면 제가 알 수 있나요?”


 “그저 소식 없으면 잘 지내는 거다. 잘 살아라.”


 “오빠는요, 오빠한테는 얘기해도 되요? 다녀가셨다고.”


 “그래라, 근데 곧이곧대로 듣겠냐.”


 “그렇겠네요.”       


이내 스르륵 잠이 든 나는 다음날이 새벽이 돼서야 깼다. 옆을 보니 남편이 아직 자고 있다. 평소라면 곧 신문이 온다고 일어났을 시간이데.


삼일장 내내, 입원기간 내내 휴가를 모두 털어 병간호를 하더니 이제 좀 편히 자는 모양이다.


어떤 표정도 그의 얼굴에서 잡히지 않는다.


그제야 알았다.


나 역시 눈물 한 방울 없이 그를 보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이제야 눈물 없이 비로소 꽤 근사한 이별을 했다. 아직도 그는 기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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