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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뽀 Aug 28. 2024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라고?

7코스, 엄마와 아이들에게 몇 번이나 그만 걷자 하던 길

  

엄마, 두 번째 올레길은 몇 코스로 걷고 싶어?


엄마와 올레 5코스 걷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의 일이다. 다음 올레길 코스는 엄마가 고르게 해드리고 싶어 물음을 던졌다. 마침 엄마는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 둔 올레길 관련 책들을 정독하고 계시던 참이었다.


"책 보니까 가장 아름다운 올레길로 7코스가 자주 나오대! 7코스 한 번 걸어보는 게 어떻겠노?"


"오, 7코스 좋지! 집에서 조금 멀긴 한데, 한 번 가봅시다~"


엄마가 제주에 머물러 계신 동안 두 번째로 맞은 토요일, 우리는 올레 7코스 걷기에 도전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주의 흐린 날씨와는 정반대로 해가 쨍쨍 내리쬐는 맑은 날이었다.


"할머니~ 있잖아~ 오늘도 사탕이랑 젤리 좀 사주면 안돼?"


"올레길 그냥 걸으면 재미 없어서 먹을 게 꼭 있어야 된단 말이야! 응? 제발요~"


아이들은 지난번 5코스 올레길을 걸을 때 발휘했던 주특기를 다시 한 번 선보였다. 손주들의 간절한 눈빛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우리 엄마는 또 한 번 편의점에서 지갑을 열게 되셨다.


"그래! 할미가 달달이들 사줄꾸마! 그거 먹으면서 7코스 열심히 걸어 보제이~"


아이들은 입 안 가득 달콤한 간식을 넣으며 행복해 하고, 우리 엄마는 그런 손주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장면으로 3대 모녀가 함께 걷는 두 번째 올레길 여정의 서막이 올랐다.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우리에겐 너무 힘든 길로 두고두고 회자된 7코스!
6코스 걸을 때 도착 스탬프 찍었던 곳이라, 더 눈에 익어서 반가웠던 7코스 시작점^^




한라산과 천지연 폭포가 한 눈에 보이는 '칠십리시공원'


올레 7코스는 서귀포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칠십리시공원을 통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른 봄날, 남편과 이중섭 미술관에 들른 김에 '작가의 산책길'을 따라 걸을 때 한 번 와본 곳이었다.


아직 쌀쌀하고 추웠던 3월에 이 공원을 걸을 때만 해도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4월, 울창한 나무로 가득한 공원 안을 걷는데도 그늘이 없어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얘들아, 여기서 할머니랑 사진 찍고 갈까?"


"아니아니, 나 너무 더워서 싫어! 사진 찍지 말고 빨리 가자~"

 

"엄마! 오늘 왜 이렇게 더워? 여긴 왜 그늘이 없는 거야~"


"아, 여기 진짜 예쁜 곳인데... 이상하게 오늘은 예쁜 줄을 모르겠네..."


똑같은 장소도 계절마다 혹은 그 날의 날씨 따라 천차만별로 느껴진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초반에 걷게 되는 이 공원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게 다 무색할 정도였다.


그늘이 없어서 걷기 힘들었던 칠십리시공원, 가끔 만나는 그늘 아래선 쉬었다 갈 수밖에!


"오늘 같은 땡볕에 걸으니까 너무 힘드네.. 엄마는 어때?"


"말 시키지 마래이... 사진이고 뭐고 찍을 생각 말고 빨리 가자..."


엄마는 이미 이글거리는 태양의 빨간 맛에 압도 당하신 듯 했다. 갑작스런 태양의 열일 덕분에, 그 날 낮 기온은 일기 예보에서 미리 알려준 온도를 훨씬 웃도는 27도가 되었다.


4월인데 한여름 같아진 날씨가 오늘 올레길 걷기의 최대 변수가 될 것이 확실했다. 걷기 시작한지 30분도 안 되어 땀을 한 바가지 흘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얇은 긴팔을 입힌 오늘 아침의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예쁜 풍경이고 뭐고, 더운 날씨 앞에선 눈에 안 보입디다! ㅠㅠ


거울 연못도, 천지연 폭포와 한라산이 한 눈에 보이는 이 곳도 너무 예쁜데! 더워서 힘들었던 기억만...




모두의 체력을 조기 소진시킨 야속한 '삼매봉 공원'이여!


숨을 헐떡이며 걷던 칠십리시공원을 최대한 빠르게 통과하고 나니 더 무서운 공원이 등장했다. 바로 삼매봉 공원이었다. 시작부터 엄청난 경사를 자랑하는 오르막길이 보이자, 모두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 오르막길 너무 싫어!"


"7코스 너무 별로야 엄마! 예쁘긴 뭐가 예뻐? 이렇게 힘들기만 한데!"


아이들은 큰 소리로 불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 얼굴은 이미 벌겋게 상기된 채였다. 벌써 더위를 잔뜩 먹은 상태인데, 가파른 오르막길을 또 올라가야 하니 싫을 만도 했다.


주말에 가끔씩 차 타고 근처 '삼매봉 도서관'에 갈 때는 삼매봉이 이렇게 높은 곳인 줄 미처 몰랐다. 아니, 7코스 초반부터 이렇게 난이도가 높은 건 반칙 아닙니까? 애꿎은 올레길을 원망하며 삼매봉을 꾸역꾸역 올랐다.


"아이고! 저것들 좀 봐라~ 아하하하하! 똥꾸멍을 왜 저렇게 쳐들고 가노?"


갑자기 내 옆에서 나란히 걷던 엄마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셨다. 앞서 가던 아이들의 오르막 오르는 신박한 자세가 재밌으셨던 모양이다.


"할머니~ 우리처럼 해봐! 그러면 오르막 오르는 게 덜 힘들 거야!"


"할머니... 우리 지금 진지한데 왜 웃어! 오르막 오를 땐 네 발 걷기가 짱이라고!"


아이들의 진지한 말투에 엄마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아 보려 애를 쓰셨지만, 별 소용은 없어 보였다. 아이들의 높이 치솟은 엉덩이는 엄마의 강력한 웃음 버튼이었다.


"아이고 참말로~ 애들 덕분에 힘든 것도 잊고 웃는다 웃어! 저 귀여운 엉덩이를 우짤꼬!"


아이들은 삼매봉 정상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몸을 낮춘 채 네 발로 기어가는 자세를 유지했고, 엄마와 나는 아이들의 귀여운 엉덩이를 감상하느라 훨씬 수월하게 정상까지 갈 수 있었다.


삼매봉 정상까지 오르는 급경사 오르막길! 아이들은 네 발 기기 자세로 전환!


삼매봉 정상에 있는 정자에 앉아서 보는 한라산이 그렇게 예쁘다더니,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그런지 한라산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까 칠십리시공원에서 본 한라산이랑 뭐 그리 다를 것도 없더만!


심지어 삼매봉을 내려가는 길도 경사가 심했다. 간격이 넓은 나무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 가야 해서 무릎이 많이 아팠다. 무릎이 쌩쌩한 나도 통증을 느꼈는데, 무릎이 약해지신 엄마는 오죽하셨을까..ㅠㅠ


갈 길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삼매봉을 내려오는 순간, 이미 한 코스를 완주한 것 마냥 체력이 소진돼 버린 기분이었다. 지도를 보니 겨우 5분의 1 정도나 왔을까, 앞길이 너무 막막하게 느껴졌다.


"이제 얼마나 더 가야 되노? 오늘은 걷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네..."


"엄마 힘들지? 근데 삼매봉처럼 높이 오르는 길은 이제 없을 거예요!"


여태 걸었던 다섯 번의 올레길 중에, 오늘처럼 극초반부터 힘들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집에서 챙겨온 초코파이로 당 충전도 하고, 물도 벌컥벌컥 많이 마셨지만 이상하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다.


급격히 소진된 체력아, 얼른 돌아와! 벌써 지치기엔 갈 길이 멀다구!

칠십리시공원에서 본 한라산과 삼매봉 정상에서 본 한라산, 어디서 봐도 한라산은 다 멋있다는 걸 굳이 확인했네!




누가 좀 알려줘요, 태양을 피하는 방법!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삼매봉을 뒤로 하고 드디어 바닷길로 접어 들었다. 그 유명한 '외돌개'를 볼 수 있는 해안 산책로였다. 길은 잘 만들어져 있었고, 뜨거운 햇살 아래 일렁이는 바다 빛깔은 더 새파랗고 예뻤다.


그러나, 올레길을 걷는 우리에겐 아름다운 바다 풍경도 사치였다. 엄마는 오래 전에 제주 여행 오셨을 때 외돌개를 본 적이 있다 하셨고, 나와 아이들은 외돌개를 보는 게 처음이었다.


다음에 또 외돌개만 보러 오지는 않을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고 가자고 했다. 그런데 사진을 찍어주시는 엄마도, 사진을 찍히는 나와 아이들도, 하나같이 눈을 찡그린 채 인상을 팍- 구길 수밖에 없었다.


어쩜 이렇게 사진 한 장 찍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태양이 이글거리던지! 땡볕 아래에서는 몇 초만 서 있어도 타들어 갈 것 같았고, 어떻게든 그늘을 찾아내 그 아래 있어야만 겨우 숨이 쉬어졌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로스'가 된 것만 같았다. 새들의 깃털을 밀랍으로 이어 붙여 날개를 만든 뒤 하늘로 날아오른 이카로스!


이카로스는 날개를 붙여 둔 밀랍이 뜨거운 태양에 녹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새처럼 날게 되자 너무 좋아서 더 높이 날아 올랐다가 바다에 빠져 죽는 비운의 인물이다.


오늘 같은 태양이라면 이카로스의 날개를 녹이고도 남았음이 분명하다. 하물며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땅 위에 발을 붙이고 걷는 우리도 흐물흐물하게 녹을 지경이구만!


"아~ 지난 주에 맞았던 비가 그립다~!"


"비 오는 날 걷는 게 100배는 더 재밌고 안 힘든데! 엄마, 오늘은 비 예보 없어?"


아이들은 지난 주의 비를 몹시 그리워 하고 있었다. 나 역시 당장 기우제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비가 내릴래야 내릴 수가 없는 날씨였다.


진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한 때 좋아했던 가수 '비'님이라도 소환하고 싶어졌다. 마침 '비'님의 노래 중에 오늘의 기분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노래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다!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태양은 계속 내 위에 있고!


외돌개를 보며 걷다가, 온몸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범섬, 아득히 먼 그대여!


6코스를 걸을 때 '섶섬'이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면, 이번 7코스에서는 '범섬'이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처음에는 아득히 멀리 보이던 범섬이었다. 지도상 범섬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7코스의 절반 가량 되는 지점이었기에, 범섬을 지나쳐야만 올레길도 절반 이상 걸었다고 볼 수 있었다.


"저기 보이는 섬이 범섬이거든? 범섬까지만 우선 가보자! 힘내 얘들아~ 힘내요 엄마~"


아이들과 엄마는 뜨거운 태양을 머리 위에 지고 걷느라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올레길을 완주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마음 속 목표는 '범섬'까지 걷기로 정해졌다.


범섬을 결승선 삼아, 조금만 더 걸어 봅시다!

저 멀리 보이는 범섬을 향해!
범섬이 가까워질수록 반갑고 반가운 마음 :)




물속에 첨벙 뛰어 들고팠던 '속골'


이윽고 도착하게 된 곳은 '속골' 유원지였다. 4월인데도 반팔 옷을 입은 아이들 여러 명이 차가운 물 속에 발이나 몸을 담근 채 놀고 있었다. 그걸 본 우리 아이들의 눈빛이 태양보다 더 강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엄마!!!!!!! 나도 여기서 놀고 싶어~ 물 속에 뛰어 들면 안돼?"


"엄마 너무 더워..ㅠㅠ 나 올레길 그만 걷고 여기서 물놀이나 할래!"


마음은 엄마인 나도 벌써 물 속에 첨벙 뛰어 든 상태였으니, 아이들은 오죽하랴! 그러나 우리에겐 여벌옷도, 물기를 닦을 수건도 없었기에 물놀이 후 뒷수습이 불가한 게 문제였다.


"얘들아, 엄마도 물에 뛰어 들라고 하고 싶지만! 나중에 수습할 방법이 없어서... 어쩌지?"


"아, 아쉽다... 여기 진짜 재밌어 보이는데... 엄마, 그러면 우리 여름에 꼭 다시 오자!"


"그래, 올레길 걸은 덕분에 속골이라는 멋진 물놀이 장소 봐둔 거니까! 여름에 와서 놀자!"


"엄마, 그러면 손이라도 좀 담그고 올게~ 으아!!! 진짜 시원하다!!!"


아이들은 물 속에 손만 담가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속골은 한여름에도 물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서 경치도 아주 그만인 보물 같은 물놀이 장소였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다시 걸어야 한다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뜨겁게 달궈진 살갗 여기저기에 차가운 물을 잔뜩 끼얹고 출발했으나, 다시 걸은 지 얼마 안 되어 금세 증발될 뿐이었다.


속골아 기다려줘, 여름에 물놀이 하러 다시 올게!

경치도 좋고, 물도 차갑고, 물놀이 하기 딱 좋아 보였던 속골!




오후의 태양을 바라보며 서쪽으로 걷는다는 건,


오후에 7코스를 정방향으로 걷는다는 건 서쪽으로 지는 태양을 똑바로 보며 걷는다는 걸 뜻했다. 어쩌다 보니 오늘은 걷는 내내 태양과 맞서 싸우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우리 네 사람 다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얼굴로 맹렬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엄마와 나는 선글라스를 껴서 그나마 나았지만, 아이들은 선글라스도 없어서 더욱 눈부셔 했다.


"엄마, 너무 더운데 아이스크림 사주면 안돼?"


"아... 여긴 너무 외진 곳이라 주변에 마트 같은 게 전혀 없는데..."


"히잉... 너무 더워서 걷기 힘들어!"


"얘들아, 조금만 더 걸으면 법환포구가 나오거든? 거기엔 마트 있을 거 같아!"


"아이고, 더운데 우리 아가들이 고생이 많다... 할미가 아이스크림 사줄게, 좀만 더 힘내그라!"


"엄마도 기운 내요! 법환포구 도착하면 좀 쉬었다 가요 우리~"


이번에는 법환포구에서 먹게 될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목표 삼아 뜨거운 길을 묵묵히 헤쳐 가기로 했다. 차가운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엄마와 나도, 타는 듯한 갈증에 아이스크림 생각이 간절한 순간이었다.

   

태양을 마주하며 걷는 길, 너무 뜨거웠던 오후...
수봉로를 지나, 법환포구로 가는 돌길! 울퉁불퉁해서 걷기 엄청 힘들었다는..ㅜㅜ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아이스크림을 얻은 '법환포구'


인적 드문 길만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법환포구에 다 왔다는 얘기였다. 바닷가를 따라 상점들이 꽤 있었는데 그 중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는 가게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제스토리'였다.


"엄마! 나 여기서 뭐 좀 구경하면 안돼? 예쁜 게 많이 있을 거 같아!"


지금까지 시들했던 둘째의 눈이 한껏 반짝이기 시작했다. 올레 6코스를 걷다가 들른 기념품 가게에서도 한참을 구경하며 행복해 하던 둘째였다. '제스토리'는 걷느라 지친 둘째의 기운을 북돋워 주기에 충분한 장소였다.


"우리 손녀들 걷느라 이렇게 고생하는데~ 할미가 이쁜 놈 하나 사줄게! 가서 골라 보거라~"


심지어 할머니가 원하는 걸 하나 사준다고 하니, 둘째는 신이 나서 2층까지 있는 '제스토리'를 샅샅이 살펴 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다리 아프다고 투덜대던 것도 다 잊은 모양이었다.


"엄마... 나는 너무 힘들어... 여기 앉아서 좀 쉴게..."


첫째는 가게 안을 돌아볼 힘도 없는지 창가에 놓인 나무 의자에 걸터 앉아 축 늘어져 버렸다. 엄마도 내가 왈종 미술관에서 선물해 드린 부채를 펼쳐 연신 부채질만 하시는 중이었고.


오랫동안 땡볕을 맞으며 걷다가 에어컨 바람이 빵빵한 실내에 머무르니 좀 살 것 같았다. 여름볕만 무서운 줄 알았더니, 봄볕도 만만치 않게 무섭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엄마... 슬라임 사도 돼? 제주 청귤향 슬라임이래!"


야무지게 기념품 가게를 둘러 보던 둘째가 선택한 것은 '슬라임'이었다. 유해한 성분이 많을 것 같아 엄마인 내가 평소에 절대로 사주지 않는 품목이었다.


"그래, 할머니가 사주시는 거니까 오늘은 뭐든 괜찮아~"


"진짜? 엄마, 그럼 나도 저걸로 같이 할래!"


과감하게 슬라임을 고른 동생 덕분에 가만히 앉아 있던 첫째도 슬라임을 득템하게 되었다. 할머니 찬스로 생각지도 못한 슬라임을 받아든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 되었다.


제스토리 옆 편의점에 들러 각자 원하는 아이스크림까지 하나씩 물고 나오자, 뜨거웠던 속이 단번에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걸으니 아까보다는 더위가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엄마, 근데 이제 보니까 저 섬 이름이 왜 범섬인지 알겠다!"


"왜 범섬인데?"


"저 섬 잘 봐봐~ 범고래랑 닮았잖아! 범고래 모양 섬이어서 범섬이라고 부르는 거 아닐까?"


"어? 진짜네? 완전 고래 모양이다!"


"나는 저 섬을 이제부터 고래섬이라고 부를 거야~"


둘째가 범섬을 '고래섬'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니, 진짜 큰 범고래가 우리 옆을 따라 헤엄치는 듯 했다. 그리고 불현듯, 내가 혼자서 정해둔 결승선인 법환포구를 진작에 통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법환포구에 도착해서 누구든 힘들다고 하면 그만 걷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잠깐 쐰 에어컨 바람과 시원한 아이스크림 덕분인지 다들 기운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참 다행인데, 안 다행인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혹시 그만 걷고 싶으신 분 없나요? 제가 그만 걷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구요...


제스토리에서 잘 쉬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고래섬과 함께 걷는 중!
가끔 만나게 되던 짧은 나무 그늘..ㅠㅠ 햇빛을 피할 수 있어 감사했던 찰나!




바닷물이 빠질 때만 걸어 갈 수 있다는 '서건도'


걷고 또 걷다 보니 바다 건너편에 '서건도'라는 섬이 보였다. 제주로 아예 이사를 와버린 나의 대학 후배가 아이들과 가보면 좋은 곳으로 추천해 줘서 미리 알고 있던 장소였다.


서건도 : 제주도에 있는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며, 바닷물이 갈라지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섬. 썰물 때마다 좌우로 넓게 갯벌이 드러나 조개와 낙지 등을 잡을 수 있음.


하루에 두 번씩 썰물 때나 들어갈 수 있는 섬이라는데, 마침 우리가 도착했을 때 서건도까지 걸어갈 수 있게 길이 잘 드러나 있었다. 운이 참 좋은 편이었지만, 서건도까지 다녀올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얘들아, 저기가 서건도라는 섬인데... 걸어서 들어갈 수 있게 길이 생겼네! 한 번 가보고 싶은 사람?"


그래도 혹시 가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봐 물어 보았으나,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나 역시 서건도까지 걸어가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었고, 엄마도 나와 눈을 마주치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셨다.


제주판 모세의 기적이라는 서건도까지 난 길을 눈으로 봤으면 충분! 서건도를 뒤로 하고 조금 더 걷자, 드디어 중간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올레요 쉼터'가 나왔다.


"아... 여기가 도착 스탬프 찍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이제 겨우 절반 걸은 거야? 너무 힘든데... 여태 온 만큼 더 걸어야 돼?"


올레 7코스는 총 17.6km인데, 중간 스탬프 지점까지 11.1km를 걸었으니 우리에게 남은 길은 6.5km였다. 고작 6.5km 남았다고 하기에는, 모두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봐둔 식당이 나오니까, 저녁 먹고 나서 생각하자! 더 걸을지, 그만 걸을지~ 오케이?"


더위를 피하려고 들어간 카페에서 빵이랑 음료로 간단히 점심을 먹은 터라, 든든히 저녁을 먹어야 했다. 켄싱턴 리조트 근처까지 걸어 간 뒤 '두가시의 부엌'이라는 갈치 조림 전문점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과연, 갈치 조림을 먹고 난 뒤에도 더 걸을 수 있을 것인가...?

서건도가 보여도 건너갈 수가 없었다! 중간 스탬프를 찍으며 잠시 쉬는 중~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강정 바닷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강정 바닷길을 아주 좋은 타이밍에 걷게 되었다. 7코스를 걷는 내내 우리를 괴롭혔던 태양이 주황빛을 내뿜으며 서서히 바다로 내려앉고 있었다.


갈치 조림을 배부르게 먹은 뒤, 아이들에게 재차 물어 보았다. 도착 지점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여기서 더 걸을지 말지 정해 보자고! 그랬더니 아이들 둘 다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더 걷겠단다.


나는 사실 "그만 걷고 싶어요"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그만 걷고 싶었으니까! (흑흑) 나이 많으신 엄마 핑계를 대볼까 했으나, 엄마 역시도 끝까지 걷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셨다!(흑흑..ㅠㅠ)


덕분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더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바다 위로 서서히 떨어지는 노을은 정말이지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지금 이 시간에 이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태양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남아 있는 모든 빛을 뿜어내며 스러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질 수 없지! 태양처럼, 내 안의 모든 힘을 쏟아내며 최선을 다해 걷는 수밖에.


오늘 하루 뜨겁게 타올랐던 태양, 그 아래서 뜨겁게 걷느라 수고한 우리


노을이 아름다운 강정 바닷길을 걷는 엄마와 나의 아이들 :)




그만 걷기로 했는데, 자꾸만 더 걷게 된 사연!


강정 해안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7코스를 우회해서 가라는 안내 표지를 발견했다. 월평포구 도로 공사로 인해 출입이 통제된 탓이었다.


해는 거의 다 저물었고, 계속 비닐하우스 사이로 걸어야 하는 외진 길만 이어졌다. 주위 풍경도 전혀 예쁘지 않았고, 가끔 목줄이 풀린 큰 개도 보여서 숨죽인 채 지나느라 무섭기까지 한 길이었다.


주위에는 가로등도 전혀 없는 터라, 여기서 더 어두워지면 한 치 앞도 안 보일 것만 같았다. 게다가 아이들은 다리가 너무 아파서 못 걷겠다 난리였고,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진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진짜 그만 걸어야 했다. 해가 지면 그만 걷는 게 올레길 위에서의 규칙이었다. 이만큼 걸은 것도 기적에 가까웠으므로,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큰 길까지 걸으면 버스 정류장이 나오거든? 오늘은 여기까지만 걷고, 버스 타고 집으로 가는 게 어때?"


"아... 거의 다 왔는데... 우리 오늘은 완주 못하는 거야?"


"응, 더 걸으면 너무 어두워져서 위험할 것 같아! 집에 가는 버스가 끊길 수도 있어~"


"아이고, 아깝긴 참말로 아까운데... 우리 아가들 힘들어 보여서 더는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더 이상은 못 걸을 것 같아! 진짜 다리 아파 죽겠어!"


"그래, 엄마도 너무 속상하지만... 다음에 여기서부터 다시 걸어서 완주하면 되니까 이만 포기하자..."


큰 길까지만 어떻게든 가 보자고 다독이니, 계속 쳐지던 걸음에도 속도가 붙었다. 인적이 없어 으슥했던 비닐하우스 사이를 겨우 빠져 나오니, 그토록 바라던 버스 정류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모두가 버스 정류장 벤치에 눕듯이 앉았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잠시 후 도착 예정이었다.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완주를 못하게 된 아쉬움을 삼키던 중, 갑자기 첫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어떡하지... 나 화장실 가고 싶어!"


비상, 비상! 버스는 곧 도착한다는데, 이 버스를 타게 되면 서귀포 시내까지 한참을 가야만 했다. 과연 아이가 그 때까지 버스 안에서 급한 볼일을 참을 수 있을 것인가? 경험에 비춰 봤을 때, 내 판단은 'NO'였다.


그렇다면 한참 기다린 게 아까워도 이번 버스는 보내주는 게 맞았다. 그것보다 더 급선무는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찾는 것이었다. 휴대폰 지도로 검색해 보니, 버스정류장 2개 이상 떨어진 곳에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


"어쩌지 우리, 화장실 때문에라도 좀 더 걸어야 될 거 같은데... 다들 괜찮을까?"


"나도 사실은 화장실 가고 싶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마! 조금만 더 걸으면 되는 거제?"


"응 엄마! 어차피 화장실 한 번씩 갔다가 버스 타는 게 나으니까... 다같이 갑시다!"


"히잉... 나는 화장실 안 급한데... 더는 안 걷고 싶은데... 언니 때문에..."


"엄마!!!! 얼른 화장실!!!! 나 급해~~"


너무 힘들어서 걷기를 포기했는데, 화장실 이슈로 인해 다시금 걷게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엄마께는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편의점은 꽤 멀리 있어서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는 거!


조금만 더 걸으면 된다고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엄마! (뒤늦은 사과)

강정 바닷길에서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던 때...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순간!




희대의 사건으로 남을 '지갑 사건'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을 것 같던 다리로 한참을 걸어가자, 마침내 편의점이 보였다. 친절하신 주인분께서 건물 뒤편 화장실을 안내해 주신 덕분에 차례대로 급한 볼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화장실을 제공해 주신 편의점 주인분께 감사해서라도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것을 맘껏 고르게 했다. 여기까지 열심히 걸어 준 아이들을 위한 선물 겸 간식이었다.


그 때였다. 이번에는 둘째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엄마!!!! 어떡해? 나 아까 거기 버스 정류장에 내 지갑 두고 왔어!"


아뿔싸..! 아이들은 각자의 지갑에 티머니 카드를 넣고 다니는데, 둘째가 아까 버스 카드를 찍으려고 지갑을 손에 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정류장 벤치 위에 그대로 둔 채 편의점까지 와버린 것!


하... 다시 그 버스 정류장까지 가기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갑 하나 잃어 버린 셈 치지 뭐! 라고 하기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이 돼서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던 둘째...


"올레길 걷고 계신 거예요? 여기서 5분만 더 가면 스탬프 찍는 곳 있어요~"


설마 했는데 역시나, 편의점에서는 불과 300여 미터만 더 가면 도착 지점이었다. 편의점 주인분께서 5분만 더 걸으면 된다고 하자, 아이들은 동시에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엄마! 조금만 더 걸으면 된대!"


"근데 내 지갑은 어떡해? 그 버스 정류장도 다시 가야 되는데..."


진퇴양난이었다. 속으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나 혼자 두 곳 다 가보기로! 아이들과 엄마는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서 쉬게 하고, 혼자서 도착 스탬프부터 찍고 올 생각이었다.


"엄마 혼자 후딱 가서 너희들 몫까지 스탬프 찍어 올게! 다리 아프니까 할머니랑 여기서 쉬고 있어~"


어두워진 밤길을 혼자 걸으려니 약간 무서웠지만, 지금까지 고생한 아이들을 대신해서 스탬프를 찍어다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도 다리가 몹시 아팠지만, 애써 괜찮은 척 하며 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에서 조금 멀어졌다 싶을 즈음, 별안간 아이 울음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울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니, 이건 우리 집 큰 딸 목소리가 분명했다.


곁에 할머니도 있는데 별 일 아니겠거니 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울음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 정도면 무슨 일이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얼른 편의점 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왜 울어?"


"아이고... 내가 다음에는 지갑 잘 챙겨야 된다고 얘기 좀 했더니, 언니랍시고 동생 편을 들대? 그래서 할머니가 뭐라 할 때는 끼어 들면 안 된다고 했더니만 이렇게 서럽게 운다이?"


생각만큼 큰 일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엄마대로, 큰 딸은 큰 딸대로 마음이 상한 듯 했다. 하루종일 걷느라 힘들었던 게 같이 터진 건지, 큰 딸은 동네가 떠나가도록 서러운 목소리로 '엉엉' 울 뿐이었다.


그 때 갑자기 행색이 남루하신 어르신 한 분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셨다.


"니 이름이 ㅇㅇ이냐?"


울고 있던 첫째 아이를 보며 대뜸 둘째 아이의 실명을 언급하시던 어르신! 처음 보는 분이 어떻게 내 아이 이름을 아는 거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어르신이 내미신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맙소사! 아까 그 버스 정류장에 두고 온 둘째 아이의 지갑이었다!


"아까 오다가 주운 건데, 카드에 이름이 써 있더만! 이거 잃어 버려서 우는 거냐?"


"어머나, 이건 우는 애 옆에 있는 동생 거예요! 와... 정말 감사합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당장 지갑을 찾으러 그 버스 정류장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고 우연히 이 지갑을 주우셨겠지만, 울고 있는 첫째 목소리를 듣고 오셔서는 지갑을 주신 게 신기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다음에는 잊어 버리지 말고~ 이건 용돈이니까 받아라!"


둘째가 지갑을 돌려 받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자, 어르신께서는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5천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같이 건네 주셨다. 그리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뜨셨다.


우리가 오히려 감사하다고 사레를 해도 부족할 에 왜 돈을 주신 거지? 갑자기 쎄한 느낌이 들어 둘째에게 지갑을 열어 보라고 했다. 지갑 속에 카드는 그대로 있었지만, 현금은 하나도 없었다.


"원래 지갑에 얼마 정도 들어 있었는지 기억나?"


"한... 5만원에서 6만원 정도 있었을 걸?"


"저 할배가 지갑 속에 있는 돈만 홀랑 가져 갔다가, 애 울음 소리 들리니까 놀라서 지갑만 돌려줬구만!"


"선심 쓰는 척 5천원은 돌려 주신 거네? 큰 돈은 다 가져가고?"


"나는 돈 잃어 버렸어도 괜찮아! 지갑 찾으러 다시 거기까지 안 가도 되니까~"


귀인인 듯, 도둑인 듯 했던 어르신! 둘째 말대로 지갑을 찾으러 그 버스 정류장에 다시 안 가도 되는 게 어디인가. 사실 애가 울든 말든 모른 척 지나 가셨으면 지갑조차 찾지 못했을 텐데, 인정은 있으신 분인 걸로!


"이게 다 내가 운 덕분이네~ 내가 큰 소리로 울어서 지갑도 찾을 수 있었던 거라구!"


맞는 말이었다. 결국엔 큰 소리로 울어 제낀 첫째 덕분에, 도둑이 제 발 저리게 된 어르신께서 지갑을 잃어 버린 아이인 줄 알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으니 말이다.


"고마워 큰 딸~ 목청껏 크게 울어줘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지갑 사건이 일단락 되고 나니,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


"우리 이렇게 된 김에, 다같이 완주하러 가는 게 어떻겠노? 이제 다리도 많이 쉬어서 안 아픈데!"


"좋아, 할머니! 나도 이제 다리 안 아프니까 끝까지 걷고 싶어!"


"우와, 우리 오늘 7코스 완주할 수 있는 거야? 그럼 나도 끝까지 걸을래!"


아이들도 엄마도, 한 마음 한 뜻으로 7코스 완주를 염원하고 있었다. 이미 어둠은 사방에 짙게 깔렸으나, 넷이 함께 걷는 길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제 진짜 5분만 더 걸으면 끝이었다. 젖 먹던 힘을 다 해, 결승선 끊으러 Go Go~!!


둘째 손에 들려 있는 지갑이 그 문제의 지갑! 덕분에 그 날 걸음수는 3만보가 넘었다지요^^




우여곡절 끝에 완주하게 된 7코스


가보지도 못할 줄 알았던 '월평 아왜낭목 쉼터'에 결국은 당도하게 되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휴대폰 손전등을 켠 채로 도착 스탬프도 찍었다.


"나는 솔직히 아까 니 혼자 도착 스탬프 찍고 온다 했을 때 너무 속상했대이~ 하루종일 고생해 놓고, 도착 지점에도 못 가보면 두고두고 후회 될 거 같더라!"


내 딴에는 엄마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그만 걸으시기를 권했던 건데... 엄마는 올레길을 완주할 수 없을까봐 내심 속상하셨던 것 같다. 엄마는 진심으로 올레길 7코스를 완주했음에 기뻐하고 뿌듯해 하셨다.


"얘들아, 오늘은 진짜 역대급으로 힘들었지? 진짜 대단하다! 7코스 걸은 소감은 어때?"


"엄마, 7코스는 진짜 최악이야... 누가 7코스 걷는다고 하면 제일 별로라고 말해줄 거야!"


"그래도 중간에 집에 안 가고 끝까지 걸어서 좋았어! 완주 스탬프 찍으니까 너무 뿌듯해~"


"하... 엄마는 오늘 몇 번이나 완주를 포기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어? 엄마가 뭘 모르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라구!"


"엄마, 우리 가족 사전에 포기란 없는 거 몰라?"


와... 올레길을 걸으며 아이들이 더 단단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소름이 돋았다. 올레길을 한 코스씩 완주할 때마다 한층 강인해진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들! 포기를 모르는  아이들 덕분에, 포기를 밥 먹듯이 하는 내가 7코스를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엄마, 불굴의 의지로 기어코 올레길 7코스를 완주해 내신 자랑스런 엄마! 저의 올레길 걷기 여정에 두 번이나 함께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엄마께서는 육지로 돌아가신 뒤에도 올레길 걷기의 진한 여운이 남으셨는지, 종종 메시지를 보내 오셨다.


딸! 덕분에 올레길을 두 코스나 같이 걷게 돼서 너무 좋았어! 귀여운 손녀들과 함께 걸었던 아름다운 제주의 길들이 오래오래 생각날 것 같아... 고마워 딸 :)


올레길 7코스... 포기하고 싶었는데,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 완주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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