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구와 박변호사의 만남
토요일 오후, 상구의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상구는 전화를 건 주인공이 누구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제 이신고 사장이 자신을 조용히 불러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상구는 생각했다. 이신고 사장은 반도체 공장을 시작했던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고. 무엇이든 돈으로 귀결되는 사람이었고, 이번 일 역시 그러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였다.
돈이 가장 좋은 상구는 이신구 사장의 그런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조심해. 혹시 만나자고 하면 꼭 만나봐.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한번 살펴봐야 하니까… 가서 겁도 좀 주고…
평소에도 경직되어 화난 것처럼 보이는 이신고 사장의 얼굴이 그날따라 새카맣게 굳어 있었다. 그는
“너만 믿는다”
며 상구의 등을 툭툭 쳤다. 굳은살 박인 손이 상구 어깨를 감싸자, 공장 구석구석에 밴 약품 냄새가 상구의 얼굴을 덮쳤다.
“안녕하세요. 박 변호사라고 합니다. 박상구 씨인가요?”
통화 버튼을 누르자 30대 후반으로 짐작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의 있는 듯하지만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박 변호사는 주말이나 평일 점심 중에 만나자고 했다.
상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허 참, 귀찮게 하네. 평일은 바빠요. 내일 어떠세요? K동 S 카페, 3시.”
상구는 박 변호사라는 사람을 만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사장의 부탁이자 명령이었다. 게다가 사흘 전 사장이 건넨 두툼한 봉투를 생각하면 거절할 수 없었다. 내일의 임무는 단 하나였다. 박 변호사가 뭘 알고 있는지 캐내는 것. 상구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봉투 속 파란 지폐를 세던 손가락의 속도와 돈이 풍기는 냄새를 떠올리며.
다음 날 점심, 상구는 아내가 차린 밥을 억지로 넘겼다. 반 공기만 먹고 수저를 놓았다. 상구가 습관처럼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담배를 꺼내 물자, 아내가 소리를 질렀다.
“의사 선생님이 담배 피우면 죽는다고 했어, 안 했어? 죽으려고 작정했어?”
상구는 며칠 전 병원에서 받은 진단이 떠올랐다. 폐 기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결과. 평소 같았으면 아내와 한바탕 했겠지만 오늘은 조용히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일요일 오후, S 카페. 창 너머로 한산한 카페 내부가 보였다. 카페 문이 열리자 딸랑거리며 종이 울렸다. 그 순간, 안쪽에 앉아있던 키 큰 남자가 일어서서 상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박 변호사였다.
상구는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다가갔다.
“선생님,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민수 씨 사건을 맡은 박 변호사라고 합니다.”
둘은 마주 앉았다.
“아직도 반도체 공장 다니십니까?”
“민수랑 달리, 난 멀쩡히 잘 다니고 있습니다.”
박 변호사가 말을 이었다.
“민수 씨가 일하던 3년 전만 해도 공장 내부에서 공격적인 실험이 많았고, 안전설비도 갖춰져 있지 않았죠.”
상구가 끼어들었다.
“이제 안전 장비도 잘 갖췄는데 뭐가 문제라서 날 부른 겁니까?”
박 변호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민수 씨 죽음의 원인을 밝히려면 3년 전 작업환경 자료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미 지금은 안전설비가 갖춰져 있어서 3년 전 상황을 입증할 길이 마땅치 않아요. 그때 민수 씨와 함께 일했던 팀원들의 진술이 절실합니다. 선생님과 그때 같이 일했던 현석 씨가 선생님 번호를 알려줘서 이렇게 연락드린 겁니다.”
현석이라는 이름에 상구의 손이 움찔했다.
3년 전에 공장에서 그 난리를 치고 나갔던 그놈. 상구와 1년을 같은 팀에서 일했던, 눈엣가시 같은 인간이었다.
“뭐, 안전설비야 3년 전에 설치되긴 했지. 그런데 몰라서 그렇지. 전에도 안전했어요. 그런데 민수가 죽은 게 왜 공장 때문이라는 거요? 그럼 나도 백혈병으로 죽어야 하고, 현석이도 죽어야 하는데 멀쩡하잖아!”
상구가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탁자를 탕하고 쳤다.
“근로복지공단 자료는 안전설비 설치 이후 측정값입니다. 3년 전이었다면 기준치를 넘었을 가능성이 커요.”
박 변호사가 맞받아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민수 씨는 공장에서 일하고 몇 년 뒤 혈소판 수치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병원에서도 이례적이라는 소견이었습니다. 당시 안전에 문제가 있었던 건 분명합니다.”
박 변호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낮췄다.
“게다가 최근 측정값도 안전기준에 거의 근접합니다. 공장 기계에서 나오는 자기장이 백혈병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도 늘고 있어요. 선생님, 협조해 주시는 건 단순히 과거를 밝히는 게 아니라, 선생님의 생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단어에 상구의 눈빛이 흔들렸다.
손끝이 서늘해졌고, 상구의 시선이 탁자 위를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비웃음이 상구 입가에 번졌다. 갑자기 나타나 정의와 생명을 운운하는 박 변호사가 야비한 미꾸라지처럼 느껴졌다.
“야! 이 새끼야. 다들 밥 벌어먹고사는데, 와서 들쑤시지 마! 소송해 봐야 질 거 뻔한 사건 파헤쳐서 의뢰인 돈이나 뜯으려는 거 아냐? 안전설비 없을 때도 괜찮았다니까! 꺼져!”
상구도 모르게 나온 고성이 카페를 울렸다. 겁에 질린 짐승이 내뱉는 포효였다.
수군거림과 함께 손님들의 시선이 이들에게 몰리자 사장이 달려왔다.
“손님, 조용히 해주시죠. 아니면 나가주셔야 합니다.”
상구는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
“변호사면 다야? 현석이 말만 믿지 말라고. 그놈 원래 거짓말 잘해.”
카페를 빠져나온 상구는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민수 측 변호사 만났습니다. 현석이 그쪽 돕고 있는 것 같습니다. 3년 전 난리 기억하시죠?”
“수고했다”라는 사장의 짧은 답. 전화가 끊겼다.
‘돈은 받았지만…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이 사장 새끼야. 3년 전에 안전설비하는 시늉이라도 안 했으면 감방 갔을 거면서......’
상구는 점심에 피우지 못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첫 모금의 연기가 허공에 번졌다. 하얀 연기 속에 의사가 보여주었던 검게 얼룩진 폐 사진이 둥실 떠올랐다.
연기와 사진이 겹치더니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메인화면: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