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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Aug 20. 2022

짜라, 최대한 쥐어짜라

노인의 질투

   말복을 사흘 앞둔 금요일 오후, 근처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커피 향기가 무미건조한 기분을 마구 헤집어놓는다. "으음~~~, 이 달콤한 냄새...^^" 단지 후문 카페에서 또 커피를 볶는가 보다. 진종일 회의자료 작성을 마무리하느라 여념이 없던 차에 달콤하고 우아한 향기가 콧속을 파고들며 기분 좋게 했다. 잠시 쉬라는 신호인가 싶어 반갑게 허락하였다. 이처럼 거리에 커피 향이 쫘악 깔리는 때면 언제나 지나간 추억이 떠올라 혼자라 즐겁다. 잠시 창밖을 내다보며 복잡한 머리를 식히는 짬이 좋다. 벌써 그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아련하지만, 당시의 기분은 마치 엇그제였던 것처럼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워터프런트(Water Front)의 국제전시회의장으로 가던 길, 홍콩 완차이 거리에 가득했은근한 커피 냄새가 그랬. 그 후, 품위 있고 활기 넘치며 멋스러운 국제도시는 다 그런 줄 알았다. 좋은 추억은 이렇듯 두고두고 삶의 활력소로 되살아나는 보약이 되어서 좋다. 어쩌다 기분이 처지면 연관된 뭔가가 기억의 상자에서 자동 소환되고, 금세 나를 다시 회복시켜주니 세상에 이런 약효도 없다.




   동대표님들에게 회의자료를 미리 배포하는 것은 잘 읽어보고, 회의에 참석해서는 각자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해달라는 뜻이다. 관리소장은 당면한 일들을 제때 처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사안들을 잘 챙겨서 회의자료 담고, 안건마다 여차여차 저차저차 그 제안사유와 근거를 꼼꼼하게 기재하느라 여념이 없다. 훗날 있을 수 있는 시비나 감사에 대한 대비책까지 고려하는 심모원려(心謀遠慮) 작업이다. 비록 회의 때마다 지각하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장 대표처럼 하나도 읽어보지도 않고 오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건 또 다른 문제다. 설령 그런 사람이 있을지라도 - 실제 그런 경우가 많지만 - 회의자료를 성실하게 만드는 것은 관리소장의 당연한 몫이다. 나는 항상 관리업무의 요체가 무엇인가를 자문하곤 한다. 핀트가 빗나가 일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기 위한 습관이다. 할 일, 해야 할 일을 적기에 처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데도 자칫 회의자료만 잘 챙긴다는 소리를 혹여라도 듣고 싶지는 않다. 과거 현직 시절, 윗사람 입맛에 잘 맞는 보고서를 꾸미느라 야근도 불사하며 매달리던 이른바 페이퍼웍(paper work) 습성이 되살아날까 봐 경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땅~, 땅~, 땅~! 당초 예정된 저녁 7시가 지나고 15분 정도 더 지나서야 회장이 정기 입주자대표회의 개회를 선언하였다. 카톡으로 약간 늦는다고 문자를 했던 그가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앉아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나무망치를 세 번 두드렸다. 회의는 첫 번째 안건부터 격론이 벌어졌다. 청소용역업체를 선정하는 것이었다. 두 번에 걸친 입찰공고가 유찰됨에 따라 유일하게 입찰서를 제출한 업체와 수의계약을 하기 위한 필수 절차다. 문제는 그 업체가 제시한 가격을 좀 깎아보자는 것이었다. 사실 입찰공고 전, 지금  청소를 맡고 있는 업체가 용역비 너무 낮아 견디기 어렵다면서 다만 얼마라도 단가를 올려달라는 건의와 함께 재계약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내왔었다. 수년째 가격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재계약의 달콤한 맛을 향유하다 보니 비로소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입찰이 불가피한 여러 사정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번에 입찰제안서를 제출한 유일한 이 업체가 - 입찰에 응해줘서 한편으로 고맙기도 했지만 - 제시한 가격은 현재 미화업체가 받고 있는 금액보다 약간 더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너무 높았으면 계약상대자로 선정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단톡방에서 사전 토의한 결과, 그 정도 금액이면 수용할 만한 적정한 수준이라고 모두가 동의한 상태에서 의결이라는 요식절차를 밟는 자리였다. 당장 바로 다음 달부터 새로운 용역이 착수되어야 하는데, 두 번에 걸친 유찰로 인하여 입찰절차가 예상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상황이 급해졌다. 그래서 미리 대표님들의 의견을 모았고, 결론이 이미 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찰서에 적힌 금액 그대로 해도 되련만, 회장이 용역비 인상이 마음에 걸렸던지 갑자기 가격을 좀 깎을 수 없겠냐며 나름 독특한 의견을 내놓았다.




   각동 계단 신주 논슬립(Non slip) - 신주는 구리와 아연을 합금한 비철금속의 일종으로 한자로는 황동(黃銅), 우리말로는 놋쇠라고 부르는 일본말이다 - 을 닦지 않는 조건으로 용역비를 약간만 인하 조정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궁작을 맞추던 다른 대표는 여기서 또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즉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그냥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1층부터 3층까지만 닦고 그 이상 나머지 층은 안 닦아도 좋다고 하면 제안업체가 받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수정 제안을 내놓으며 야릇한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느 쪽을 적용하더라도 내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도찐개찐으로 보였다. 세대수가 500세대 미만으로 작은 단지이다 보니 관리비가 인상되는 요인에 대표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딜(deal)을 이렇게 시도하는 건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튀어나오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홍일점 여성 대표가 보다 못해 이때 한 마디 하였다. "이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우리가 너무 쪼잔한 거 아니에요? 창피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쯧쯧 혀를 다. "알겠습니다. 협의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것이 아무리 고육지책이라 하더라도 생각들이 참 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대표님들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한다.




   오늘은 가급적 빨리 끝내자고 시작한 회의였지만, 시계는 벌써 9시를 지나고 있었다. 벌써 2시간이 경과한 것이다. 회의가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던 차에 대표 중 최고 연장자인 박 이사님이 불쑥 직원들의 급여가 너무 높다며 볼멘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안건에도 없는 불만사항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기 위하여 귀를 쫑긋 기울였다. 특히 내가 올 초 부임할 때부터 줄곧 정리해야 한다며 사적, 공적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난하는 김 주임을 겨냥하는 발언이었다. 인근의 공공임대아파트에 사는 그는 올해 만 66세로 8년째 기전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요는 급여를 능력에 따라 책정해야 하는데, 김 주임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기력이 빠지고 부실하니 해마다 삭감해야 한다고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말하자면, 일반기업의 임금피크제처럼 기준을 만들어 적용하자는 뜻이다. 자연 나이를 능력의 잣대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봉급을 내리자면, 김 주임을 자르고 더 낮은 급여를 제시해 구인공고를 내면 된다고도 하였다. 그러면 오히려 훨씬 젊은 사람이 와서 일도 더 잘할 것이라는 중구난방식 논리를 펴며 좌중을 압도하는 듯하였다. 나이가 많아서 잘라야 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팔팔한 젊은 사람을 더 싸게 채용하자는 것인지 나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가 이미 고령사회에 접어든 마당에 이처럼 노인이 노인을 시기하고 공격하는 볼썽사나운 광경이 벌어졌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착잡하고 참담한 생각이 쉬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변 단지와 비교해도 경쟁력이 별로 없는 게 실상인데, 그런 사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아집야속하고 애처로워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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