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21
적어도 이들이 좋아하는게,
익숙함이 아니라는 건 잘 알겠어요.
이틀째 아침, 유럽 특유의 쨍한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며 예사롭지 않은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호텔 식당에서 조식을 든든히 챙겨 먹은 뒤, 시연용 노트북과 묵직한 VR 장비들을 챙겨 들고 게임스컴 2018이 열리는 ‘쾰른 메쎄(Koelnmesse)’로 향했다.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서자 세계 최대 게임쇼라는 명성에 걸맞게, 아직 개장 전임에도 행사장 앞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게이머들의 설렘과 흥분이 팽팽한 공기를 타고 그대로 전해졌고, 눈길을 사로잡는 코스플레이어들의 화려한 행렬이 입구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압도적인 활기를 바라보며 문득 ‘덕 중의 덕은 양덕’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새삼 실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마련한 B2B 공동관 부스에 도착하자마자 장비 세팅에 돌입했다. 현지 통역사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오리엔테이션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지만, 벌써 손님들이 부스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독일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벨기에, 체코, 핀란드까지. 국적도 언어도 제각각인 방문객들이 끊임없이 부스를 찾았다. 문화적 배경은 달라도 ‘재미’라는 본능적인 관심사 하나로 모두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준비해 간 ‘갤럭시티’ 빌드를 적극적으로 시연했다. 화면 속 가상 세계에 몰입해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빛을 반짝이는 관람객들의 반응을 보니 절로 힘이 났다. 진심 어린 흥미를 표현하며 날 것 그대로의 피드백을 건네는 그들의 태도에서, 비로소 내가 진짜 글로벌 시장의 최전선에 서 있음을 실감했다.
긴장과 기대, 그리고 묘한 반가움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게임쇼의 첫 오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점심 무렵이 되자 서서히 허기가 몰려왔다. 아침에 진흥원 측에서 한식 도시락 주문 여부를 물었을 때, ‘쾰른까지 와서 굳이 한식을 먹어야 하나’ 싶어 거절했던 결정이 금세 후회로 다가왔다. 게임스컴 행사장은 그 규모가 워낙 방대해,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외부 식당에 다녀오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결국 전시장 내 푸드코트로 발길을 돌렸다. 이케아 식당을 연상케 하는 평범한 유럽식 뷔페였지만, 가격만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공항 물가보다 더하네’ 싶은 가격표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접시를 채우며 내일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밖에서 먹으리라 다짐했다. 겉으로는 화려한 축제처럼 보이지만, 이 거대한 행사가 결국은 정교하게 설계된 ‘비즈니스의 장’임을 다시금 뼈아프게 실감한 순간이었다.
오후 일정이 재개되자 미팅의 흐름에서 흥미로운 양상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서유럽과 북유럽의 바이어들은 주로 게임 퍼블리싱을 목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한 반면, 동유럽 쪽은 그래픽이나 프로그래밍 개발 수주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 같은 유럽권이라도 국가별 시장의 크기와 경제적 성격에 따라 비즈니스 접근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대형 퍼블리셔들의 전략도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부스를 꾸며놓고 “우리 쪽으로 와서 직접 경험해 보라”는 식의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서비스를 하나의 예술적 전시품처럼 진열해 체험을 유도하고, 자연스럽게 비즈니스로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소규모 외주 업체들은 쉴 새 없이 부스를 돌며 자신들을 어필하고 기술력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유비소프트(Ubisoft), EA, 닌텐도(Nintendo) 같은 글로벌 거물급 기업들은 이미 사전 예약된 미팅 일정이 꽉 차 있어 현장에서 즉석으로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렵사리 찾아가도 인포데스크에서 명함 한 장 주고받는 게 고작이었고, 실질적인 협력안을 논의하기엔 현실적인 벽이 높았다.
그렇게 세계 시장의 높은 벽과 뜨거운 열기를 동시에 체험하며, 게임스컴 2018의 첫날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숙소에 무거운 장비들을 내려놓고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시내로 향했다. 메쎄 앞에서 출발하는 트램은 쾰른 구석구석을 잇는 훌륭한 이동 수단이었다. 특히 전시 참가자에겐 행사 기간 내내 무료로 개방되어, 예산이 빠듯한 우리 같은 스타트업에겐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혜택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쾰른 구시가지의 심장부인 ‘올드 마켓(Alter Markt)’ 광장이었다. 중세 시대부터 시장과 축제가 열리던 이 유서 깊은 광장은 겨울이면 화려한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탈바꿈하는 곳이다. 광장을 둘러싼 레스토랑과 펍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은 정겨웠고, 해가 진 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이면 야외 테라스는 맥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특유의 활기차고도 여유로운 분위기에 매료된 우리는 쾰른에 머무는 동안 마치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매일 밤 이곳을 찾게 되었다.
이날 저녁은 ‘브라우하우스 시온(Brauhaus Sion)’에서 해결했다. 쾰른의 자부심인 쾰쉬(Kölsch)는 가펠, 프뤼, 시온 등 브랜드마다 맛이 조금씩 다른데, 이곳은 상호처럼 ‘시온’ 맥주를 주력으로 냈다. 우리는 ‘블루트 부어스트(Blutwurst)’라 불리는 독일식 피순대와 전통 요리 몇 가지를 주문했다. 맥주 애호가인 나에게 쾰른이라는 도시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비어 가든처럼 느껴졌다.
식사 도중, 자연스럽게 낮에 있었던 시연 반응에 대해 친구와 머리를 맞댔다.
“의외로 야구나 축구 같은 스포츠 콘텐츠는 반응이 미적지근하네.” “그러게. 오히려 두바이에서 영감을 얻었던 고공 파이프 건너기에 사람들이 훨씬 더 몰입하더라고.”
우리가 가장 공을 들였던 서바이벌 슈팅 콘텐츠가 기대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한 건 뼈아픈 대목이었다. 아마도 비슷한 형태의 FPS 게임이 이미 시장에 포화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튿날부터는 유저들의 호응이 가장 뜨거웠던 ‘고공 체험’을 전면에 내세워 부스를 운영해보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식당을 나선 뒤에도 아쉬운 마음에 근처 펍 몇 군데를 더 전전했다. 낯선 도시의 밤거리에서 길쭉한 슈탕에 잔을 연신 비워내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침대 위로 쓰러졌다.
폭풍처럼 지나간 첫날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 이들이 우리 부스를 찾아와 우리를 놀라게 할까. 그런 기분 좋은 긴장감을 품은 채 쾰른에서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편, '독일 쾰른 :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넣어봤어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