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집안은 발 디딜 곳 없이 쓰레기가 굴러다녔다. 텔레비전이 지지직거리면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방송을 내보냈다. 여기저기 장판이 뜯겨 있고 방 안 가득 지독히도 담배 쩔은 냄새가 났다. 앞섶 주머니에 담배를 꽂은 스님이 둘을 맞이하며 방으로 안내해주셨다. 종이컵과 전기포트를 쥐고 차를 권하셨으나, 둘은 극구 사양했다. 전기포트 안에 무시무시한 하나의 생태계가 서식 중이었다고. 당신이 새집을 지어야 하는데 돈이 없다는 기구한 사연을 늘어놓으시며 집을 사라고 권하셨다고 했다.
꼬리는 돌아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그 집은 누가 살 집이 아니라 당장 철거해야 하는 상태라고 잘라 말했다. 들레네 친구들은 경악과 웃음을 섞어 그 일화를 떠올렸다. 솔직히 그 스님을 약간 무시했던 건 사실이다. ‘스님이란 사람이 그렇게 살다니…’하는 마음. 그런 내가 지금 와서 그 스님을 향한 연민과 공감이 들 줄이야.
혼자 사는 건 분명 수행에 좋은 점이 있지만, 나태해지기 딱 좋은 환경이기도 했다. 혼자 수행하는 건 정말 고도의 수행력이 필요하다. 식구가 있으면 방을 마구 어지럽힐 때 잔소리해줄 사람이라도 있다. ‘매일 명상할 거야!’라고 큰소리를 떵떵 쳐두었을 때, 보는 눈이 있으면 창피해서라도 며칠 더 포기하지 않고 버티기도 한다. 그런데 나 혼자면 나와의 약속을 지키거나 말거나 아무도 감시하지 않는다.
혼자 수행할 때 놀라운 경험이 있다. 일찍이 죽은 줄 알았던 성욕이 무덤에서 돌아왔다. 분명 에이 섹슈얼이 된 줄 알았는데… 내 집은 인터넷도 안되고 먹을 것도 없고 놀 친구도 없다. 누릴 수 있는 쾌락이 자위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식욕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자연식물식에 익숙해진 듯하다가도 월경주기가 되면 과자를 일주일 내내 사 먹게 되곤 했다. 한 달간 겨우 수행이 안정기에 들었다 싶었는데, 점점 명상과 요가가 지겨워지면서 성욕과 식욕이 우후죽순 고개를 들었다.
‘이래서 다들 절에 들어가나보다…’ 싶었다. 고시생들이 왜 스파르타식 학원에 가는지 알 것 같았다. 수행이 잘 되다가, 엉망이 되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정말로 절실하게 출가를 고민했다. 결국 명상센터에 장기 봉사를 했는데, 봉사의 강도가 너무 세서 손목 관절염이 생긴 후 절로 옮겼다. 절은 참 좋긴 했는데 큰 스님이 자꾸 출가를 권해서 부담스러웠다. 나도 사실 출가가 간절했는데 꼬리 때문에 갈등 중이었다(불교 신자가 아니라서 고민도 됐다. 명상센터에서 스님처럼 수행할 수 있었다면 명상센터로 갔을 것이다.) 꼬리가 대학을 마저 다니느라 아직 단둘이서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돌연 출가하기는 너무 아쉬웠다.
꼬리에게 진지하게 몇 차례 출가 얘기를 꺼내 보았다. 내 삶에서 마음 수행이 너무 중요했고,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고. 스님이 되더라도 서로 종종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으냐고 덧붙였다. 꼬리는 별로 안 괜찮아 보이는 표정으로 ‘칩코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응원할 거야’라고 하더니, 나중엔 정말로 안 괜찮다고 털어놓았다. 우리가 아무리 폴리아모리이기로써니, 그 대상이 부처님이 될 줄을 몰랐다며 한탄했다. 나도 안 괜찮기는 마찬가지였다. 꼬리랑 계속 같이 살고 싶은데, 혼자 수행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냈느냐 하면… '노오력'하는 수밖에. 학원 갈 형편이 안 된다 하면 공부 안 할 일인가. 그냥 죽으라고 혼자 해내는 수밖에 없다. 고작 일 년이긴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혼자 수행하는 게 익숙해졌다. 꼭 절에 들어가지 않아도 할 만해졌다. 종종 명상센터나 절에 가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명상 뽕’을 재충전하고 온다. 명상센터나 절은 사람들이 순수한 기운을 잔뜩 남겨두고 가서 그런지 명상이 기가 막히게 잘 된다. 꼬리도 한 번은 절에 와서 함께 수행하고 갔다. 부처님과의 폴리아모리도 꽤 성공적인 셈이다.
지금 내 목표는 내 집을 절처럼 만드는 것이다. ‘여기가 내 사원이다’ 생각하고 청소도 게을리 않고 정령들에게 인사도 한다. 무엇보다 이젠 혼자 산다는 느낌이 별로 없다. 방안에 침묵도, 벌레도, 물건 정령도, 바람도, 햇빛도 함께 존재한다고 여긴다. 혼자 살면 얼마든 망나니(?) 같이 살 수 있다는 착각은 더욱 없다. 나를 단단하게 감시하고 수호해주는 존재들이 내 수행을 함께 도와주고 있다. 그래도 또 모른다. 언제 내 집이 그 스님처럼 귀곡산장이 될지. 그러니 누굴 깔볼 것도 없다. 포기하지 않고 언제든 다시 서원을 세우는 힘이 내 안에서 자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