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효진 Mar 28. 2024

#6 그녀는 예뻤다

인생 미용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6화)


 앳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성태는 노란 트위드 원피스 차림의 여자아이를 마주했다. 치마 끝단과 하얀 반스타킹 사이로 보이는 무릎이 유난히도 하얗게 반짝거렸다. 그녀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은 귀 뒤로 가지런했고, 카라 중앙에는 작은 보석이 박힌 리본이 가느다란 목을 감싸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역시 그녀의 얼굴이었다. 작은 얼굴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쌍꺼풀진 커다란 눈, 오뚝한 콧대에 살짝 보이는 까만 점, 핑크빛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하는 그녀에게 성태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과연 어릴 적 보았던 바비인형이 살아있다면 꼭 이런 모습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번 박 기사님은 사우나에서 데려오시더니, 이번에는 대리로 만난 기사님? 하하, 아빠 엉뚱하신 건 알아줘야 된다니까요~"

톡 쏘는 목소리와 상반되는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미소에 헤벌쭉 따라 웃는 성태였다.


 "반가워요. 김 설아예요. 23살 대학생이고, 앞으로 자주 보겠네요! 저희 아빠 잘 부탁드려요."

그녀는 헤실하게 웃는 그를 훑어보고는 작고 하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갑자기 성사된 취직에 높은 월급, 매일 보게 된 아름다운 그녀까지. 성태에게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었다.




 아침 8시. 대표님 집으로 출근을 마치면, 소파 옆에 곧게 서서 마음속으로 카운트를 센다. 1분.. 2분.. 4분.. 5분. 성태는 정확히 시곗바늘이 5를 향할 때, 고개를 돌려 복도를 쳐다본다.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자박자박-' 늘 단정한 차림의 설아가 모습을 나타내고, 곁을 지나치며 하는 짧은 인사로 비로소 성태의 하루가 시작된다.


그렇게 대표님과 사모님, 설아가 모두 모였을 때 그들은 다 함께 앉아 다과를 나눈다. 물론 성태도 함께였다. 두 달 넘는 시간 동안 매일 아침을 같이 보내니, 성태는 이들과 이대로 가족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설아 씨랑 결혼하면 나도 가족이 될 수 있을 텐데..'

꿈같은 상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왔고, 그 웃음을 캐치한 사모님이 웬일로 말을 걸었다.


 "최기사님 무슨 기분 좋은 일 있나 봐요?"

성태는 상상을 들킬세라 입꼬리를 내리면서 한편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냥.. 좋네요. 이렇게 다 같이 앉아서 과일도 먹고.. 가족이 생긴 거 같달까..? 하하"

우물쭈물 말을 하는 성태를 큰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던 설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물었다.


 "오빠는.. 혼자예요?"

설아의 질문에 성태는 대표님을 슬쩍 살폈다. 끄덕이며 한번 얘기해 보라는 긍정의 제스처에 숨을 고르고, 아빠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술김에 루나에게 얘기한 뒤, 타인에게 털어놓은 건 처음이라 마음이 후련하면서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다행히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불우한 환경에 설아가 자신을 안 좋게 보면 어쩌나 싶었던 걱정은 설아의 코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쏙 사라졌다. 대표의 표정은 언제나 그래왔듯 똑같았고, 사모는 성태를 촉촉한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조용한 위로가 건네지는 아침에 성태는 마음이 간질거렸다.




 "루나 선생님, 잘 지냈어요? 요즘 인기 있는 디저트래요! 줄 서서 사 온 거예요. 하하"

일과를 마친 성태는 달달한 디저트를 준비해 미용실로 향했다. 루나를 만난 뒤 신기할 정도로 삶에 행운이 찾아온 건 확실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고마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 감사해요. 단 거 정말 좋아해요.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요?"

불행을 숨길 수 없듯이, 온몸으로 비집고 나오는 행복도 감춰지지 않았다.


 "하하, 그래 보여요? 맞아요. 요즘 정말 좋아요. 지난번 머리하다가 급하게 콜 받고 나갔잖아요? 대리 뛰고 바로 취직됐어요!"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자랑하듯 신나게 떠들어대는 그의 들뜬 모습에 루나도 미소를 지으며 호응을 했다. 한창 즐거운 대화가 오고 가던 중, 거울 속 루나와 눈이 마주친 성태는 급격히 정적을 만들어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쭈뼛쭈뼛 기어가는 목소리가 루나의 귀를 지나쳤다.


 "네?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루나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성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발끝을 쳐다보며,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저.. 감사해서요. 여기만 왔다 가면 좋은 일이 생기는 거 같아서.. 막 머리 잘라주시면서 불행도 잘라가시는 거 아니에요? 하하"

어색한 농담을 던지며 천천히 루나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순간 멈칫하는 그녀였지만, 이내 재밌는지 컬러안경을 위로 올려 눈가를 슥슥 닦으며 크게 웃었다. 살짝 올라간 안경 밑으로 가려져있던 눈동자가 보였다. 뿌연 회색빛의 컬러였다.


 '뭐지..?'

성태는 잘못 봤나 싶어 유심히 살폈다. 확연한 회색빛의 컬러였다. 시력을 잃은 아빠의 눈동자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녀는 컬러 안경을 고쳐 쓰고, 심상치 않은 성태의 표정을 보더니 가위를 들어 다시 커트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정교한 빗질과 가위질, 눈이 멀었다니.. 절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성태였다.

 '렌즈를 꼈나?'


 "어쨌든, 이제 취직도 했고 깔끔하게 다녀야 해서 자주 올게요."

 "저야 좋죠. 많이 밝아진 거 같아서 보기 좋네요. 이제는 행복하겠어요?"

루나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궁금하다는 듯 또 한 번 행복을 물었다. 성태는 행복했다. 하지만, 설아를 떠올릴 때면 아직 부족했다. 설아를 갖고 싶었다.


 "행복이요? 그렇죠 행복하죠. 행복한데.. 조금 씁쓸해요. 대표님 가족이랑 있으면, 병원에 있는 아빠 생각에 자꾸 초라해지는 거 같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성태는 그간 미용실에서 말했던 고민이 해결되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꾀가 났다. 설아를 가져야만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속이 보이는 거 같아 아빠를 핑계로 빙빙 말을 돌렸다.


루나는 눈을 굴리며 말하는 성태의 표정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숨겼다. 루나의 행동은 마치 너의 머릿속이 다 보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겠네요. 행복은 참 멀리 있죠. 힘내요. 씁쓸하지 않길 바랄게요."

 "네.. 감사해요."


 미용실 문을 나서는 성태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루나와 얘기를 나누고 나니 이미 설아가 자신의 것이 된 것만 같았다.




 "성태 오빠, 좋은 아침! 어? 넥타이 비뚤어졌다."

어김없이 8시 5분이 되어 방에서 나온 설아는 분홍색 체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오늘따라 더 하얘 보이는 그녀가 냉큼 넥타이를 만져대는 손길에 머리가 어질했다.


 "아.. 어.. 제가 해도 되는데..."

어버버 말하는 성태의 모습이 퍽 귀여웠는지 설아가 꺄르르 웃는다.

 "하하하. 오빠 귀 빨개졌어요. 괜찮아요 저도 할 줄 알아요. 제가 해줄게요."


심장이 요동쳤다. 성태는 자신이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대표님이 볼까 불안했다. 설아는 넥타이를 새로 매는 동안 두리번거리기 바쁜 성태를 흘긋 보고는 살짝 뒤꿈치를 올려 그의 귓가로 다가갔다.


 "오빠,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네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조곤조곤 말하고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섹시할 정도였다.


 '와.. 뭐야 진짜.. 가족 한번 돼 보자 이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