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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효진 Apr 04. 2024

#7 행운이 우연하게 겹쳐 올 때

인생 미용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7화)


 두 사람의 묘한 기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역시 운명은 성태의 편에 서게 된 걸까? 으레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평범한 사랑의 과정일까.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설아가 내비치는 사소한 관심들에 행복할 뿐이었다.


 "아빠, 저 오늘 스터디 회식 있어서 늦을 거 같아요!"

 드라마에서 접해오던 부잣집은 늘 어딘가 서먹했다. 하지만 설아의 가족은 달랐다. 룸미러로 보이는 뒷자리의 모습만 봐도 그랬다. 철철 흐르는 애교 섞인 말투로 이야기하는 설아, 그런 딸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표. 둘의 모습에 괜스레 흐뭇해지는 성태였다.


 "최 기사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딸을 바라보던 대표의 시선이 성태의 뒤통수로 옮겨갔다. 그 부탁은 사랑에 빠진 성태에겐 절호의 찬스였다.

 "오늘 내 일과 끝내면 설아랑 따로 연락해서 데리러 가줘요. 늦은 시간이라 걱정되네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성태의 두 눈동자는 뒷자리에 앉은 설아에게 향했다. 그녀는 룸미러로 보이는 그와 눈을 맞추며 싱긋 웃어 보였다. 창문으로 스치는 길가의 앙상한 나무 한 그루에도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성태였다.




 12월 초. 겨울의 해는 짧지만, 오늘만큼은 성태에게 유난히 긴 시간이었다. 출근길 한번, 퇴근길 한 번이 끝인 설아와의 만남. 그마저도 가족들과 함께였는데, 무려 둘만의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푹 쉬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네, 설아 잘 부탁해요. 최 기사님."

대표에게 정중함은 일상이었다. 자신이 설아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해도 한결같을지.. 걱정과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오후 8시. 해는 진즉이 졌지만, 아직 설아를 만나지 못한 성태에게 밤은 멀게만 느껴졌다. 매일 퇴근 후 보러 가던 아빠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재활 치료는 잘 받았는지, 밥은 잘 챙겨 먹었는지, 궁금할 시간이 없었다.

 성태는 대학교 근처 식당이 즐비한 곳에 주차를 했다. 창밖으로는 한잔 걸친 학생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가득 들려오고, 수많은 남자들이 보였다. 그 모습에 점차 초조한 성태는 한창 놀고 있을 설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학교 근처입니다. 끝나면 연락 주세요.'

여자친구를 데리러 제 차를 끌고 온 남자친구인 양, 시트를 뒤로 젖히고 설아의 답장을 기다렸다. 1시간 정도 흘렀을까. 설아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최 기사님! 성ㅌㅐ오빠? 이제 끝나써요."

평소 흐트러짐 없던 설아에게 누가 봐도 술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성태는 시트를 당겨 앉을새 없이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설아는 생각보다 금방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속에서는 여러 명의 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왔다.


 '하.. 진짜..'

성태는 답답한 마음에 수화기 너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여기저기 식당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거리 양쪽으로 대여섯 집을 지나칠 때쯤 수화기 소리와 반대편 귀의 소리가 일치하는 지점이 있었다. 그곳에는 남자들 사이 무심하게 핸드폰을 손에 쥔 채 간신히 서있는 설아가 보였다. 


설아는 높은 구두를 신고 휘청여 위태로워 보였고, 성태는 알 수 없이 휘감아 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혹여나 놀랠까 조심스레 뒤로 다가갔다. 주변의 남자들은 자신보다 한 뼘이나 크고 다부진 성태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너네 왜 그래?"

설아는 친구들의 표정에 휙 몸을 돌리려다 중심을 잃고 성태의 명치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야.. 죄송해.. 어! 오빠!"

 "괜찮아요? 술을 얼마나 마신 거예요.."

머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들던 설아는 성태의 얼굴에 활짝 웃음을 지었다. 


 "뭐야? 누구야? 설아 남자친구 있었어?"

아주 살짝 진 속 쌍꺼풀에 강아지 같은 눈망울, 우뚝 자리 잡은 콧대, 말할 때마다 입가에 파이는 보조개까지. 어느 누가 봐도 준수한 모습이었다. 친구라는 남자들의 표정은 망연자실함이 역력했다. 하지만 벼랑 끝으로 내몰린 건 오히려 성태였다. 설아가 자신을 운전기사로 소개한다면, 많은 이들의 안도 섞인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친구? 아~ 성태오빠? 꺄르르 오빠 우리 가요! 얘들아 나 먼저 갈게!"

설아는 장난기 가득하게 웃으며 성태의 팔을 잡고 끌었다. 성태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설아의 손에 이끌려 벼랑 끝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설아는 어느새 성태에게 몸을 맡기고 걸었다. 누군가 본다면 폭 안긴, 영락없는 커플의 모습이었다. 성태는 시끌벅적한 거리의 소음에도 설아의 숨소리에만 온 신경이 쏠렸다. 사실, 설아가 친구들 앞에서 운전기사라 소개했어도 서운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무안하지 않게 데리고 나와준 설아의 행동이 궁금했다. 성태가 설아에게 묘한 기류를 느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설아의 호의였을지 모르는 일이기에.. 


 "아아! 아니 나 앞에 앞에"

차에 도착한 성태가 설아에게 평소와 같이 뒷문을 열어주자 설아는 손사래 치고는 앞문으로 다가가 문을 벌컥 열었다. 당황했지만 취한 설아를 말릴 새는 없었다. 성태는 잠시 주춤하며 운전석으로 향했다.


고요한 차 안의 적 막을 깬 건 설아였다.


 "아.. 머리 아파.."

성태는 준비해 둔 숙취해소제 뚜껑을 열어 손에 쥐여주었다.

 "좀 마셔둬요. 무슨 일 있어요? 취할 때까지 마신 거 처음 보는데.."  

 "그냥.. 오늘 기분이 좀 별로였는데, 여차저차.. 많이 마셔버렸네요. 그래도 오빠 보니까 좋아요."

성태는 힘 빠진 설아의 모습에 차마 출발하지 못하고, 에라 모르겠다며 운전 조작에서 손을 떼버렸다. 

 "저.. 설아 씨, 아까는 고마웠어요. 그 친구들 앞에서.."

설아는 성태의 말에 배시시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아.. 그거.. 에이 데리러 와줘서 내가 고맙죠. 그리고 귀찮게 하는 남자 애들도 있었고.. 애들 표정 보니까 오빠 덕분에 알아서 해결된 거 같던데요?"


성태는 설아의 말에 어떤 용기가 났는지, 무리수를 던졌다.

 "또 귀찮게 하는 사람 있으면 얘기해요.. 데리러 갈게요! 뭐 남자친구라고 소개해도 되고.."


옆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설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머쓱함에 마주할 수 없었다. 성태는 기어레버를  D로 옮기고, 서서히 차를 움직였다. 설아는 허둥대는 모습에 기분이 좋은지 성태의 손등에 손을 살짝 올렸고, 찌릿하게 올라오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하, 오빠 앞에 봐야죠 앞에."


기아 위 포개진 두 사람의 손이 어색함에 간질거렸다. 설아는 부끄러운지 하품하는 시늉을 하며 눈을 감았고, 성태는 슬며시 손을 감싸며 얇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커다란 손을 끼워 넣었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도로를 달리는 차 안은 유난히 따뜻하고 포근했다. 




 출근하지 않는 오랜만의 주말이었다. 느지막이 눈을 뜬 성태는 덩그러니 놓인 손을 정성스레 끌어안았다. 꿈이 아닌가 싶어 만진 손에는 여전히 생생한 감촉이 남아있었다. 


 [오빠, 잘 잤어요? 어제는 고마워요.. 덕분에 따뜻하게 잘 왔어요!]


 "따뜻했어요.. 따뜻했어요! 내 손이 따뜻하긴 하지!!!"

성태는 얼굴에 두 손을 가져다 대며 한참을 뜨끈하게 비벼댔다.


삐리리리리- 삐리리리리-


 "웬일이야, 형님 쉬는 건 어떻게 알고."

성태는 기분이 한껏 올라 재민의 전화를 받았다. 흥이 난 성태의 목소리를 재민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뭐야~ 왜 신났어. 저녁에 집에서 술이나 한 잔?"

 "좋지! 나 아빠한테 들렀다 오면 5시쯤 될 거야."

자랑하고 싶은 얘기가 한가득이었던 성태는 벌써부터 입이 근질거렸다.




 성태는 병원에 들러 집에 오는 길에 어김없이 복권방에 들어갔다.

 "요즘 5000원씩 당첨되는 게 예사롭지 않단 말이야."

취직이 된 후로 다시 꾸준히 복권을 사 오던 성태였다. 1등은커녕 적은 금액도 당첨되지 않던 행운이, 요 근래는 소소하게 찾아오고 있었다.


 "성태~ 왔냐. 문 열어줘 추워"

이미 도착한 재민이 옥탑방 평상에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에 성태는 배를 움켜잡았다. 

 "하하하하하하하, 거기서 뭐 해 너? 웃겨 죽겠네."

 "추위에 떨고 있는 게 웃겨..? 왜 이래?"

재민은 혀를 끌끌 차며 문을 여는 성태를 비집고 집으로 들어섰다.  


 "야, 이거 뭐냐? 뭔 명함에 이름이 없어? 이거 그거 아냐? 무슨 여신?"

신발장 옆 선반에서 금색의 명함을 발견한 재민은 그림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너 저거 알아??"

성태는 뒤를 돌아 놀란 듯 재민에게 물었다.

 "당연히 알지. 나 어릴 때부터 그리스 로마신화 책 끼고 살았잖아."

재민은 한대 얻어맞은 듯 멍하게 서있는 성태를 툭 치며 왜 그러느냐 되물었다. 

 "아.. 어.. 야 일단 앉아봐 마시면서 얘기해 줄게."


지금까지의 일을 한참 이야기하던 성태는, 믿을 수 없다는 재민의 표정에 무릎을 탁 치며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티비를 틀어 복권방송에 멈추고 화면과 종이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곧이어 보란 듯이 내보였다. 


 "야, 봐바. 나 또 당첨됐잖아. 장난 아니라니까?"

당첨이었다. 무려 5만 원. 기세등등해진 성태의 표정에 재민은 지긋이 바라보고 술 한 잔을 따랐다.


 "근데 조심해. 행운이 우연하게 너무 많이 겹치면, 행운이 아닐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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