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인생 미용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07화

라이킷 39 댓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조효진 Apr 04. 2024

행운이 우연하게 겹쳐 올 때.

인생 미용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7화)

두 사람의 묘한 기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역시 운명은 성태의 편에 서게 된 걸까? 으레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평범한 사랑의 과정일까.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설아가 내비치는 사소한 관심들에 행복할 뿐이었다.

"아빠, 저 오늘 스터디 회식 있어서 늦을 거 같아요!"

드라마에서 접해오던 부잣집은 늘 어딘가 서먹했다. 하지만 설아의 가족은 달랐다. 룸미러로 보이는 뒷자리의 모습만 봐도 그랬다. 철철 흐르는 애교 섞인 말투로 이야기하는 설아, 그런 딸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표. 둘의 모습에 괜스레 흐뭇해지는 성태였다.

"최 기사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딸을 바라보던 대표의 시선이 성태의 뒤통수로 옮겨갔다. 그 부탁은 사랑에 빠진 성태에게 절호의 찬스였다.

"오늘 내 일과 끝나고, 설아랑 연락해서 데리러 가줘요. 늦은 시간이라 걱정되네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성태의 두 눈동자는 뒷자리에 앉은 설아에게 향했다. 그녀는 룸미러로 보이는 그와 눈을 맞추며 싱긋 웃어 보였다. 창문으로 스치는 길가의 앙상한 나무 한 그루에도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성태였다.

12월 초. 겨울의 해는 짧지만, 오늘만큼은 성태에게 유난히 긴 시간이었다. 출근길 한번, 퇴근길 한 번이 끝인 설아와의 만남. 그마저도 가족들과 함께였는데, 무려 둘만 있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푹 쉬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네, 설아 잘 부탁해요. 최 기사님."

대표에게 정중함은 일상이었다. 자신이 설아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해도 한결같을지.. 걱정과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오후 8시. 해는 진즉이 졌지만, 아직 설아를 만나지 못한 성태에게 밤은 멀게만 느껴졌다. 매일 퇴근 후 보러 가던 아빠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재활 치료는 잘 받았는지, 밥은 잘 챙겨 먹었는지, 궁금할 시간이 없었다.

성태는 대학교 근처 식당이 즐비한 곳에 주차를 했다. 창밖으로는 한잔 걸친 학생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가득 들려오고, 수많은 남자들이 보였다. 그 모습에 점차 초조한 성태는 한창 놀고 있을 설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학교 근처입니다. 끝나면 연락 주세요.'

여자친구를 데리러 제 차를 끌고 온 남자친구인 양, 시트를 뒤로 젖히고 설아의 답장을 기다렸다. 1시간 정도 흘렀을까. 그녀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최 기사님! 성ㅌㅐ오빠? 이제 끝나써요."

평소 흐트러짐 없던 그녀에게 누가 봐도 술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성태는 시트를 당겨 앉을새 없이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설아는 생각보다 금방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속에서는 여러 명의 소리만 왁자지껄 들려왔다.

'하.. 진짜..'

성태는 답답한 마음에 수화기 너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여기저기 식당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거리 양쪽으로 대여섯 집을 지나칠 때쯤 수화기 소리와 반대편 귀의 소리가 일치하는 지점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아침에 본 분홍색 체크 원피스 차림의 설아가 남자들 사이에서 무심하게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서있었다.

그녀는 높은 구두를 신고 휘청여 위태로워 보였고, 성태는 알 수 없이 휘감아 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혹여나 그녀가 놀랠까 조심스레 뒤로 다가갔다. 주변의 남자들은 자신들보다 한 뼘이나 큰 성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너네 왜 그래?"

설아는 그런 친구들의 표정에 휙 돌아보다 발이 꼬여 그대로 성태의 명치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야.. 죄송해.. 어! 오빠!"

머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설아는 성태의 얼굴에 활짝 웃음을 지었다. 명치에 그녀의 숨결이 채 가시기 전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어.. 누구야? 설아 남자친구 있었어?"

멀끔한 성태의 모습에 친구라는 남자들의 표정은 망연자실함이 역력했다. 하지만 벼랑 끝으로 내몰린 건 오히려 성태였다. 설아가 자신을 집 운전기사로 소개한다면, 많은 이들의 안도 섞인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친구? 꺄르르 몰라도 돼~ 나 먼저 간다!"

그녀는 장난기 가득하게 웃으며 벙찐 성태의 팔을 잡고 끌었다. 성태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벼랑 끝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어느새 설아는 성태에게 기대 걷고 있었다. 누군가 본다면 영락없는 커플의 모습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 가운데 그녀의 숨소리에만 온 신경이 쏠렸다. 성태는 친구들 앞에서 다정하게 자신을 데리고 나와준 그녀의 행동에 혼란스러웠다. 운전기사라고 소개했어도, 서운해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둘 사이 묘한 기류가 있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설아의 호의였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설아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아니, 알아야 했다.

"아아! 아니 나 앞에 앞에"

차에 도착한 성태가 설아에게 평소와 같이 뒷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손사래 치고는 앞문으로 다가가 문을 벌컥 열었다. 당황했지만 취한 그녀를 말릴 새가 없었다. 성태는 대표님이 아시게 되면 어쩌나 걱정도 잠시, 설레는 마음을 안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고요한 차 안의 적막을 깬 건 설아였다.

"아.. 머리 아파.."

성태는 준비해 둔 숙취해소제 뚜껑을 열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좀 마셔둬요. 무슨 일 있어요? 취할 때까지 마신 거 처음 보는데.."

그녀는 취기가 조금 나아졌는지, 성태의 따뜻한 온기에 건네받은 병을 수줍게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냥.. 오늘 기분이 좀 별로였는데, 여차저차.. 많이 마셔버렸네요. 그래도 오빠 보니까 좋아요."

성태는 그런 설아의 모습에 출발하지 못하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기어레버에서 손을 뗐다.

"저.. 설아 씨, 아까는 고마웠어요. 그 친구들 앞에서.."

설아는 성태의 말에 배시시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아.. 그거.. 귀찮게 하는 애들이 몇몇 있어서.. 아까 봤죠? 오빠 나타나니까 걔들 표정. 하하하"

성태는 설아의 말에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앞 유리만 쳐다보며 무리수를 던졌다.

"또 귀찮게 하는 사람 있으면 얘기해요.. 데리러 갈게요! 뭐 남자친구라고 소개해도 되고.."

옆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설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머쓱함에 그녀를 마주할 수 없었다. 성태는 기어레버를 D로 옮기고, 그대로 차를 움직였다. 허둥대는 모습에 그녀도 기분이 좋은지 그의 손등에 살짝 손을 올렸고, 그제야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하, 오빠 앞에 봐야죠 앞에."

설아는 그 말을 끝으로 성태와 눈을 맞추다 스르르 잠에 들었고, 성태는 손등에 닿은 그녀의 손을 바로 고쳐 잡았다.

12월 8일, 성태의 낮은 길고, 밤은 짧았다.

출근하지 않는 오랜만의 주말이 왔다. 성태는 느지막이 눈을 뜨고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 꿈만 같았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지는 손의 감촉이 현실이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을 못 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핸드폰을 울리는 메시지 소리에 꿀꺽 삼켜졌다. 설아였다.

'오빠, 잘 잤어요? 어제는 고마워요.. 따뜻했어요! 월요일에 봐요!"

"따뜻했어요.. 따뜻했어요! 내 손이 따뜻하긴 하지!!!"

성태는 얼굴에 두 손을 가져다 대고 한참을 뜨끈하게 비벼댔다.

삐리리리리- 삐리리리리-

"요~ 웬일이야, 형님 쉬는 건 어떻게 알고."

성태는 기분이 한껏 올라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흥이 난 성태의 목소리를 친구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뭐야~ 왜 신났어. 저녁에 집에서 술이나 한 잔?"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은 얘기가 한가득이었던 성태는 벌써부터 입이 근질거렸다.

"좋지! 나 아빠한테 들렀다 오면 5시쯤 될 거야."

성태는 병원에 들러 집에 오는 길에 어김없이 복권방에 들어갔다.

"요즘 5000원씩 당첨되는 게 예사롭지 않단 말이야."

운전기사로 취직이 된 후로부터 다시 꾸준히 복권을 사 오던 성태였다. 1등은커녕 적은 금액도 당첨되지 않던 행운이, 요 근래 5000원씩 소소하게 행복을 안겨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