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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 율 Oct 22. 2023

식사 벌레

-식사 벌레-


며칠 전부터 '노을이 연두'의 보호자가 바뀌었다.


은비의 침대 위로 구겨져서는 안 될 것 같은 자소서가 널브러져 있다.

거절당한 회사에 대한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제대로 된 대학생활을 즐기지도 못하고

교환학생으로 미국 조지아주의 한 대학에서 돌아온 지 6개월!

다행히 외국친구들을 사귀고 영어공부도 많이 했지만

지금, 은비는 대한민국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

현실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겨울의 찬바람을 이겨야 하고

여름의 끈적이는 더위와 싸워야 한다.

이름다운 가을을 걱정 없이 즐겨야 하는 포지션에 있어야 하고

그래서, 꽃피는 봄을 오롯이 볼 줄 알아야 한다.

봄은 본다고 해서 봄이지 않는가.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은비의 시간은 불편하고 불공평하게 흐른다.




오늘은 알바를 가는 날이다.

동네 상가에 밀집된 학원가에서 수학 채점일을 도우는

이른바 보조교사일이다.

그래도 선생님이라고 아이들이 문제를 물어본다.

'내가 문제가 많은데 나에게 문제를 묻고 답을 요구하는 아이들'.

공식과 풀이과정을 설명해야 한다.

은비는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예의 바른 아이와

"이거 답이 뭐예요?"라고 시험지를 툭 던지는 싸가지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땐, 선배 선생님의 노하우를 써먹는다.

전자는 학원선생 보다 친절하고 쉽게...

후자는 답지를 보여주며 체크!

이래야 머리가 터지지 않고 급 매운 게 덜 땡긴다.

공부는 해야겠고 수학은 어렵고 성적은 잘 받아야 하는 K-중딩의 역습.

훅~들어오는 질문에 은비는 버텨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내 인생도 수학공식처럼 답이 나오길 바라본다.

지금은 풀이과정이라고 은비는 생각했다.




어젯밤 은비는 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했다.

또 다른 준비 중인 시험이 다가왔다.

발밑에 늘어져 있던 강아지도 기지개를 켠다.

서로의 눈을 보며 깨어난 위장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갈증과 함께...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어야 한다.

샐러드와 사과반쪽 그리고 고구마반쪽을 먹기로 한다.

은비는 다이어트 중이다.

미국에서 기름진 식사에 불규칙한 생활. 그리고 학업 스트레스로

체중이 많이 불었다.

다행히 170이 넘는 키와 헐렁한 박스티로 뚱뚱하다는 세상의 기준을 커버하고 있을 뿐이다.


그동안 은비는 언론사 몇 군데와 대기업 엔터테인먼트 파트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도 전에 정중한? 불합격문자를 통보받았다.

"요즘은 참 희망 뺐어가는 속도도 빠르군...

내일쯤에라도 받으면 덜 서운할 텐데..."

마치 누군가를 이미 뽑아놓고 들러리 세운 느낌이라 더 더럽군...기분이가.

스물세 살! 심술 난 개구리의 볼처럼 은비의 불만이 커졌다.

가족 단톡방에 불합격문자를 복사해서 올렸다.

아무렇지 않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난, 괜찮다고.


기차는 불합격 문자보다는 느리게 집으로 달렸다.

마치 청춘의 무료함과 세상의 냉정한 충돌을 피하기라도 하듯

빠르게... 또 느리게


달리는 기차 안에서 단톡방의 알림이 울린다.

동생 준이의 톡이다.

은비는 톡을 열어 내용을 본 후 울컥 과속방지턱을 넘 듯

감정이 교차했다.

누나를 위로해야 할 입장과 가족구성원의 역할은 망각한 채

준이는 자기가 키우는 개구리 '노을' '연두'에게 밥을 주라는 내용이다.



내리사랑 이러고 했던가.

다섯 살 차이 나는 동생은 착한 아이다.

운동을 좋아하고 동물도 사랑한다. 그리 외롭게 자라지는 않았지만

언제부턴가 동물을 입양하고 키우고 있다.

몇 해 전에는 키우던 아프리카 도마뱀이 죽어서 며칠간 울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살아있는 생명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을 것이고

사랑을 쏟던 어떤 '숨'이 멈춰서 보내야 하는 쓰디쓴 경험도 한 놈이다.

그 후 몇 년이 지났다.

이별의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 듯 얼마 전 '팩맨'이라는 개구리 한쌍을

들고 왔다. 도마뱀을 보내고 상처가 아문 시간이 되었나?

아무튼...

언제부턴가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기의 식솔들을 챙기지 않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사람이 집안의 생명체를 챙겨야 했다.


은비는 받아들였다.

분말을 물에 개어 떡밥처럼 만든 다음 핀셋으로 팩맨의 주둥이에 들이대야

식사를 하는 과묵한 파충류.

또 한 가지는 주식인지 간식인지는 모르지만 플라스틱통 안 톱밥 사이에서

쉼 없이 꿈틀거리는 밀웜(meal worm)

한동안 징그러워서 은비는 쳐다보지도 못했다.

갑자기 팩맨의 보호자가 됐다.

의무감에 노을이 연두에게 밥을 주는 은비는

그동안의 영어실력이 녹슬지 않게 사고도 단어도 영어로 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 마이 갓~!

밀   웜... 얘들아~

'식사벌레'  먹자!


은비는 다이어트 중이라 오늘 저녁을 굶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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