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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봉을 나눠주고 싶은 사람

by 김초아

남편의 이십 년 지기 친구들은 일 년에 서너 번씩 모여 여행을 간다. 총각 시절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여행을 갔다는 남편, 그러나 친구들 중 가장 먼저 결혼한 그에게 자녀가 하나, 둘 생기면서 자연스레 여행에 함께하지 못하는 일이 늘게 됐다. 어쩌면 나의 잔소리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번에도 바쁜 일정으로 가지 못한 남편에게 친구들은 한라봉 한 상자를 보내겠다고 전화했다. 며칠 뒤, 함께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안고 날아온 커다란 상자는 제주에서 우리 집까지 금세 도착했다. 배를 타고 왔을까, 비행기를 타고 왔을까. 물고기를 친구 삼아, 구름을 벗 삼아 온 상자를 보고 있자니 감동은 배가 됐다.


커다란 상자를 집 안으로 들여 뚜껑을 열었다. 한라봉의 싱싱한 내음은 현관에 솔솔 퍼졌다. 꼭지에는 아직 푸른 이파리가 달려있었다. 오밀조밀 줄 서있는 과일들을 보니 참 앙증맞다는 생각을 하며, 봉긋하게 머리가 솟은 한라봉을 하나 집어 코에 댔다. 상큼한 향기가 코안을 가득 채웠다.

“엄마, 이게 뭐야? 우와! 한라봉이다!”

맞다, 그걸 보고 가만히 있지 않을 녀석들이 있었지.

앉은자리에서 세 개, 네 개를 까먹는 아이들. 맛이 어떠냐고 물으니 엄청 맛있단다.

“이거 정말로 맛있어. 진짜 맛있어.”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남편의 발령으로 낯선 도시로 이사 온 나에게 처음으로 허물없이 대해준 그녀. 우리는 이사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놀이터에서 만났다.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고 있어 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는데, 그것보단 초면임에도 처음 만난 것이 아닌 것 같은 끌림이 있었다. 동그랗고 선한 눈매에서 나오는 배려는 낯가림이 심한 나를 편안하게 해 줬다. 새로운 도시 생활을 하며, 궁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쏟아지는 나의 질문에도 귀찮은 내색 없이 진심으로 알려 준 어른스러운 어른이었다. 경계심 많은 나에게 먼저 건네준 그녀의 인사는 내가 이 도시에 금방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힘을 주었다.


‘어느 것이 가장 맛있을까.’

커다란 봉지에 가장 예쁘게 생긴 한라봉을 골랐다. 머리가 봉긋하면 봉긋할수록 좋은 것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 머리를 길게 삐죽이고 있는 것을 집었다. 몇 개를 주는 것이 좋을까. 너무 적게 주고 싶진 않고, 그렇다고 많으면 받는 사람이 부담스러울까 봐 한참을 고민했다. 네 개, 다섯 개. 다섯 개가 좋을 것 같다가 내 마음에 차지 않아 하나 더 꺼냈다.

휴지로 하나하나 먼지를 털어내고 봉지에 눌리지 않게 차곡차곡 담았다.

‘받는 사람이 좋아해야 할 텐데. 어쩌면 집에 한라봉과 비슷한 오렌지나 귤이 가득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을까. 아니야, 그래도 분명 좋아할 거야.’

그녀라면 진심으로 좋아해 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담은 봉투를 들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연락처를 알지도 못하는데, 마치 만날 걸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만났다.


약속 없이도 만날 수 있는 사람.

이유는 몰라도 이 시간에 길을 나서면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맞는 사람.

주파수가 같은 사람, 결이 비슷한 사람.

오래 대화해도 전혀 힘들지 않은 사람.

가끔 봐도 자주 본 것처럼 편안한 사람.

맛있는 것이 생기면 그중 가장 맛있는 걸로 골라서 나눠 주고 싶은 사람.

미운 것 말고, 못생긴 것 말고, 맛없는 것 말고, 상한 것 말고, 안 먹는 것 말고, 가장 좋은 걸로 주고 싶은 사람.


낯선 도시에서 한라봉을 나눠 주고 싶은 한 사람이 있으니, 몽글거리는 기분 좋음이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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