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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자cho Mar 28. 2018

이스라엘에서 가장 잘 잡히는 고기는?

비늘 없는 생선, 그리고 메기 소동

아빠는 낚시광이다. 오해 말길. 실력은 형편없다. 사실 이건 괴리가 아닐 수 없다. 아빠와 낚시를 간 기억은 넉넉한데 비해 물고기를 잡아본 기억은 단 하나다.  


나의 기억 회로 속 가장 먼 곳에서 닿는 낚시 기억은 갈릴리 바다에서의 낚시다. 갈릴리 바다가 밑으로 물결치는 어느 갑판 위에 걸터앉아 낚싯대를 내렸다. 아빠는 그곳에 자리를 잡기까지 몇 번이나 차창을 내리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었다. 물어물어 찾아온 명당이었다.  


아빠는 비장했다. 엄마는 잠시 풍경을 감상하는 듯하다가 유유히 남은 낚싯대를 들었다. 나는 가운데 앉아 잡히는 물고기의 개수를 잘 세는 역할을 맡았다. 투명한 통에 바닷물을 담아와 팔다리 사이에 꼭 끼어 놓고 지켰다. 이 대결에서 누가 더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 날은 내가 기억하는 아빠가 물고기를 잡은 날이 아니다.  


같은 자리에서 엄마만 일곱마리의 작은 물고기를 잡았다. 아빠는 어떻게 그렇게 많이 잡느냐 신기해했고, 엄마는 나도 잡는데 왜 한 마리도 못 잡느냐 안타까워했고, 나는 긴장감 없는 7:0 스코어에 그저 허탈했다. 단 한 마리만이라도 아빠의 미끼를 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의 열정이 바닷속까지 전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때 잡았던 물고기는 손가락 몇 마디 크기의 아기 물고기들이었다. 몸통엔 작은 은빛 비늘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앞코는 갈릴리를 닮아 푸른빛으로 반짝였다. 예수님의 제자 어부 베드로가 잡았던 물고기라 이름이 ‘베드로 고기’(peter’s fish)라 했다. 이 녀석들은 성경에 기록된 옛적부터 수천 년간 갈릴리에 번식하며 아직도 호수에 산다. 근처 호숫가 식당들에선 관광객 필수 코스인 ‘베드로 고기 요리’ 정식을 팔았다. 한국인 입맛에는 별로라고 했다.  


잘하는 것을 좋아하는 일은 흔하다. 그 반대의 경우는 귀하다.


정말 좋아하는 일은 여러 번의 실패도 새 도전을 가로막지 못한다. 주말이면 아빠는 트렁크에 낚싯대를 챙기고, 나를 조수석에 태워서 낚시할 만한 큰 물을 찾아 나섰다. 오늘 저녁은 매운탕이라는 기약 없는 약속으로 거듭된 무수확에 비관적으로 돌아선 엄마를 달랬다.  



실패는 영원하지 않은 법, 아빠가 팔뚝만 한 메기를 여러 마리씩이나 잡은 날을 기억한다. 그날도 나는 아빠의 주말 고기잡이 시도에 동원되었다. 차는 갈멜산 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고 있었다. 아직 물가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창밖으로 넓은 연못들이 펼쳐졌다. 한적한 도로 옆, 진흙과 함께 큼직한 웅덩이들이 끝없이 나타났다. 아빠는 차를 세워 낚시용품을 꺼냈다. 작은 간이의자에 나를 앉혔다.


물속엔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다. 흙과 찌꺼기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선 놀랍게도 아빠가 미끼를 던지는 족족 꼬리 달린 거대 민달팽이들이 딸려 나왔다. 좀 기괴하게 생긴 애들, 생선 같진 않고 정면으로 보면 얼굴이 있는 동물 같았던 아이들. 고양이마냥 수염이 있다고 해서 메기(catfish)라고 불린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 비늘 없는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잡질 않으니 갈릴리 호숫가에도, 요단강에도 활기 넘지는 메기들이 포식의 위협따위는 받지 않는 덩치를 뽐낸다. 어느 생태계도 메기 천국인 이스라엘에서 메기란 단연 가장 잡기 쉬운 물고기일 것이다. 아빠와 나는 그 날 메기들을 잡고 놓아주고를 반복하는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놀라운 성과를 엄마에게 보여주기 위해 메기 한 마리를 아이스박스에 담았다. 차 안의 공기는 비릿한 내음과 들뜬 기분이 가득했다.  


돌아가는 길에 안내 표지판을 읽게 되었다. 우리가 낚시(?)한 그곳은 다름 아닌 대규모 메기 양식장이었다. 더이상 관리가 되지 않는 버려진 곳이었는데, 양동이로도 잡힐 만큼 물 반 고기반 상태 까지 방치된 곳이었다. 굶주린 고기들로만 말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먹지 않는 돼지를, 메기를 대량으로 키워서 수출한다. 그게 또 짭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흔한 메기라도 다른 곳에선 잡아본 적 없는 아빠가 연이은 성공 행진을 보여준 이유가 밝혀졌지만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빠와 나, 우리 둘만의 비밀로 두었다. 깜짝 놀랄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양식장 얘기는 말해봐야 김 빠지는 일이다.


대문 밖에서부터 목청껏 엄마를 불렀다. 서프라이즈! 엄마 앞에서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메기가 기다렸단듯이 펄떡여 마룻바닥으로 튕겨 나왔다. 물도 없었던 아이스박스에 비린내가 진동했다. 아빠는 녀석을 잡으려 엉거주춤 돌아다니고 계셨다. 좌우로 몸부림치는 힘 있는 검댕이가 바닥에 온몸을 비비며 거실로 전진하고 있었다. 거실은 엄마가 아끼는 가구들의 집약 공간이다. 우리 집의 ‘얼굴’이라며 먼지가 쌓일세라 온갖 청소 약품으로 매일같이 광을 내는 곳이다. 엄마는 절규하고 있었다.  


"안돼! 페르시안 카펫!"


그 순간 아빠가 메기를 잡아서 아이스박스에 넣고 뚜껑을 빨리 닫아버려서 정말 다행이었다.  


"어우,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네"


엄마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빠도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셨을 것이다. 메기가 든 아이스박스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베란다로 옮겨졌다. 그날 밤, 죽었으려나, 하고 아이스박스를 조심스럽게 열었는데, 틈 사이로 메기가 다시 튕겨져 나왔다. 이번에는 베란다에서 펄떡펄떡 춤을 췄다. 유리문 안쪽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그것을 곧장 치우라고 명령하셨다. 분부대로 메기는 옮겨졌다. 아빠는 아이스박스를 지상주차장 후미진 구석에 두었다.



그런데 메기가 사라졌다. 주말이 지나고 보니 아이스박스에서 메기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흔적조차 없었다. 관리인이 전하기를 온 동네 고양이들이 주말 내내 야옹야옹 그 앞에서 울었다고 한다. 아이스박스는 손잡이를 아래로 누른 채 옆으로 밀어서 열리는 꽤나 지능을 요하는 구조였는데 한 “smart cat”가 그것을 결국 열었던 것이다. 정말로 길고양이가 고기를 먹었냐고 아빠는 재차 물었다. 관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이 본 메기의 최후를 열렬히 증언했다.


"The cat was eating the catfish!"


아빠가 낚시로 고기를 들어 올린 적은 내 기억 속 메기가 한 번이다. 물론, 주입된 기억은 여럿 있다. 내 ‘진짜 기억’ 속엔 없지만 그 이야기를 아빠로부터 들을 때마다 마치 내가 기억해낸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가 기억 못 하는 어릴 적이더라도 그 장면이 즉시 그려진다. 메기 양식장에서 잡힌 메기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던 설렘의 감정이 내 마음에 즉시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허탕 치는 아빠를 수없이 목격한 나에게도 여전히 아빠는 낚시 영웅이다. 물고기 몇 번 잡아본 적도 없이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빠의 낚시 사랑이 그 자체로 영감이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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