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에 새긴 기억

김창열 미술전 관람기

by 글사랑이 조동표

물방울에 새긴 기억 – 김창열展 관람기


추석 연휴의 한가로운 오후,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김창열(1929–2021)의 삶과 예술을 총망라한 회고전이었다.



그의 대표작 물방울(Waterdrops)은 이미 여러 매체와 제주도의 김창열 미술관에서도 접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그의 일생을 꿰뚫어 만든 많은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단순한 물의 방울이 아니라, 기억과 고통, 그리고 삶의 흔적이 응축된 존재로 다가왔다. 그 앞에 선 나는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 전쟁의 상흔에서 태어난 물방울


전시장 벽에는 작가의 고백이 적혀 있었다.

“6·25 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다.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며 물방울을 그렸다. 근원은 거기였다.”



그의 물방울은 단순한 자연의 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의 잔혹한 상흔, 친구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작은 영혼의 눈물이자 총알 자국 같은 구멍의 변주였다. 물방울이 반짝이는 순간, 나는 그것이 눈물이자 총알 구멍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평범한 ‘물’의 이미지가 이렇게 무겁고 아픈 기억의 형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저려왔다.



- 뉴욕에서 파리까지, 고독 속의 실험


1960년대 중반, 김창열은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차가운 소비문화 속에서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고립감과 소외감은 오히려 작업의 전환을 낳았다. 두텁고 무거운 앵포르멜(informel: 1950년대 전위예술의 한 축을 담당한 추상 회화 운동)회화에서 벗어나, 그는 점차 물리적 사실성과 빛과 그림자의 관계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이후 파리에서 ‘물방울’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며, 그는 세계 미술계에 독창적인 언어를 제시했다. 1971년, 낡은 캔버스 뒷면에서 물방울 한 점을 발견한 순간, 그는 평생을 바칠 작업의 길을 정했다. 그 작은 발견이 한 인간의 예술을,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의 한 흐름을 바꾸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 물방울, 동양의 정신성과 만나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극도의 사실성으로 그려졌지만, 그것이 지향한 바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물방울은 불교적 공(空) 사상, 동양 철학의 명상과 깊이 닿아 있었다. 텅 빈 듯하지만 가득 차 있고, 흩어지는 듯하지만 영원히 남는 것. 그 모순적 아름다움은 우리 삶의 본질과도 닮아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그는 물방울 위에 한자와 문자를 겹쳐 그리며 ‘회귀(Recurrence)’ 연작을 발표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읽었던 천자문이 물방울과 겹치며, 언어와 이미지가 공존하는 또 다른 사유의 장을 열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기억을 넘어, 한국적 정체성과 동양적 사유를 세계 미술 속에 각인시키는 실험이었다. 물방울 속에 글자가 스며든 순간, 나는 그것이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생각하는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무슈 구뜨 도, ‘물방울 씨’로 불린 삶


파리 교외 팔레조에 작업실을 마련한 이후, 그는 현지에서 “무슈 구뜨 도(Monsieur Gouttes d’Eau, 물방울 씨)”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의 작업실은 동료 예술가와 지인들이 모이는 공간이자, 예술적 교류와 인간적 대화가 오가는 작은 살롱이 되었다.



사진 속 그의 방은 담백했다. 오직 물방울 한 점으로 이름을 대신한 그 공간은, 화려하지 않지만 누구보다 깊은 울림을 품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시기였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물방울이 탄생했다는 그의 회고가 마음을 울렸다.

“가장 고통스러울 때 물방울이 튀어나온 거야.”

그 말은 마치 고통 속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예술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 전시를 마치며


전시장 끝에 다다르자 수많은 물방울 그림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각각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같은 것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삶과 닮아 있었다.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 같아도, 각 날은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김창열의 물방울은 단순한 시각적 재현을 넘어, 상처와 기억을 품은 치유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전쟁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의 응답이었고, 동시에 삶의 무게를 견디는 우리 모두를 위한 위로였다.



전시장을 나서는 길, 나는 마음속에 이런 문장을 새겨 넣었다.

“물방울은 떨어지는 순간 사라지지만, 그 흔적은 영원히 남는다.”



그 순간, 내 안에도 작고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조용히 맺히는 듯했다.



1. “물방울은 단순한 물의 흔적이 아니라, 기억과 고통을 품은 영혼의 눈물이었다.”


2. “총알 자국 같은 물방울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3. “작은 발견 하나가 한 사람의 예술을,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의 길을 바꾸었다.”


4. “물방울은 텅 빈 듯하지만 가득 차 있고, 흩어지는 듯하지만 영원히 남는다.”


5. “가장 고통스러울 때, 물방울이 튀어나왔다.”


6.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듯해도, 각 날은 결코 같은 적이 없었다.”


7. “물방울은 떨어지는 순간 사라지지만, 그 흔적은 영원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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