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정주행에 져버린 명상 생활인의 변명
이번 주, 나의 루틴이 깨졌다.
약 3~4개월간 잘 지켜왔던 나의 루틴, 아침 명상하고, 일기 쓰고, 독서하고 저녁에 또 명상하는 나의 루틴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분명 이번주도 나의 루틴을 지키며 기분 좋게 한 주를 시작하였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지금의 나는 잠을 충분히 못 자서 매우 피곤한 상태며, 일기는 밀려 있고, 읽고 있던 책도 진도가 나가지 못한 지 한참이다.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걸까?
루틴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이번주 수요일부터다.
한 3주 전이었나? 같은 팀 팀원으로부터 OTT 예능을 하나 추천받은 게 있었다. 추천받은 예능은 총 11부작으로, 이미 엔딩까지 공개가 되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고, 사실 다른 친구가 이미 한 번 추천했던 적이 있었다. 2번이나 똑같은 프로그램을 추천받다니, 궁금하면서도 쉽게 시작하기 망설여졌다. 쉽게 시작을 못했던 이유는 이 프로그램이 이미 엔딩까지 나와있고, 11부작이나 된다는 점이었다.
나는 정주행을 싫어한다. 정주행과 본방사수 중 고르라면 나는 후자를 선택한다. 정주행을 싫어하는 이유는, 나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정주행 시작한 프로가 너무 재밌다면? 그리고 이미 완결까지 나있는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이 다 그렇겠지만, 나 역시 중간에 끊지를 못한다. 뒷 내용이 궁금해서 5분만 더 볼까? 10분만 더 볼까? 나와 타협을 하다가 결국 날밤을 샌다. 더 글로리가 그랬고, 더 지니어스가 그랬고, 피의 게임이 그랬다. (내 예능 취향 너무 나오네 ^^)
그래서 이미 완결이 나버린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것에 굉장한 부담감을 느낀다. 이건 11부작이라니, 최소 11시간을 써야 한다. 그리고 사실 말이 11시간이지, 요즘 OTT 예능은 1화가 최소 1시간 30분에서 길게는 2시간까지 하니 최소 15시간은 써야 한다. 하루에 1시간~2시간씩 나누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본다면 참 좋겠지만, 나에게 그런 자제력이 없다는 사실을 난 매우 잘 안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OTT 정주행을 쉽게 시작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주에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아주 오랜만에 예능 정주행을 시작했다.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고, 너무나 당연히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3~4개월간 잘 지켜온 나의 루틴도 와르르 무너졌다.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일 동안 11부작 예능을 몰아봤다. 3일간 퇴근하고 새벽 1시 2시까지 보다가 겨우 끄고 잠을 잤다. 늦게 자니 당연히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도 없었다. 잘 지켜왔던 미라클 모닝 루틴도 깨졌다. 아침저녁 살뜰히 챙겼던 5분~10분의 명상 시간도 패스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쓰는 1일 1page 일기도 순식간에 밀렸다. 매일 나에게 긍정적 영감을 불러 일으켜줬던 책도 펼치지 않았다. 이번 달에는 열심히 하겠다 다짐했던 저녁 운동도 패스했다. 그렇게 3일을 온전히... OTT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띵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속된 말로 갑자기 현타가 세게 온 것이다. 요 며칠을 돌아보니 나에게 남은 것이 없는 한 주였다. 내 안을 채우는 것은 하나도 없이, 그저 콘텐츠를 소비하고 소비하고 또 소비했다. 오늘 하루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어떤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는지, 오늘 감사할 일은 무엇이고 난 어떤 소소한 성취를 만들었는지 남은 게 하나도 없었다. 매주 루틴을 실천하며 내가 만족스러웠던 한 가지는, 내가 매주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었다. 눈에 띄는 성장은 아니더라도, 나는 매주 발전하고 있음을 느꼈고 그 사실이 주는 자기만족이 굉장히 컸다. 그런데 이번주는 그게 없었다. 정체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OTT 정주행이 무너뜨린 나의 루틴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다. 나는 선포했다. 이번 주말은 무너진 루틴을 다시 회복시키는 주말이다!
무너진 루틴을 일으키는 법 1.
밀린 다이어리 쓰기
나는 일단 책상에 앉아 다이어리를 폈다. 3~4일간 쓰지 않은 다이어리가 4page였다. 나는 한 장씩 채우기 시작했다. 억지로 1page를 꽉 채우려고 하진 않았다. 단지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감사했던 일, 소소한 성취를 이뤘던 일, 그리고 그날 하루의 총평을 짧게 써나갔다. 며칠이나 됐다고, 3일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 떠올리는 게 가물가물했다. 그래도 계속 기억하고 떠올리며 감사했던 일 3가지, 소소한 성취 3가지를 썼다. 그리고 그날 하루를 총평했다. 총평은 대부분 "OTT 보느라 루틴이 무너졌다"의 내용이 다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밀린 일기 장수를 채우니 마음도 조금 안정적으로 변하였다. 텅 비었던 마음이 20% 정도 채워진 기분이다.
무너진 루틴을 일으키는 법 2.
가볍게 읽기 쉬운 책 읽기
요 며칠 OTT를 보며 도파민에 절여진 뇌에서 책을 읽고 생각하는 뇌로 다시 전환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동안 자기계발서만 읽느라 사놓고 읽지 못했던 쉬운 책들을 손에 집었다. 유명 인플루언서가 쓴 에세이, 문구인을 위한 추천책 정도였다. 쉬운 책들을 가볍게 몇 장씩 읽으며 내 뇌를 다시 책을 읽고 생각하는 뇌로 전환시키기 위한 워밍업 시간을 가졌다.
무너진 루틴을 일으키는 법 3.
나가서 달리기 하기
이게 가장 필요했다. 나가서 달리기 하고 뛰면서 정신 차려야 했다.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그동안 미뤄뒀던 아침 루틴인 명상, 일기 쓰기, 책 읽기 시간을 끝내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애플워치 차고, 모자 쓰고,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4월, 봄이어서 날도 따뜻하니 뛰기 딱 좋은 날씨였다. 한강변을 따라 천천히 달리며 다시 일상을 살아왔던 감각을 일으켰다. 달리는 발바닥의 감각, 발목의 힘에 주의를 기울이며 달렸다. 발목에 힘이 좀 더 들어가지는 않는지,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고 앞꿈치로 사뿐사뿐 달리려면 어떻게 발을 디뎌야 하는지 주의를 기울였다. 요 며칠 도파민에 절여졌던 내 뇌를 정화하고 내 몸과 감각에 집중하며 다시 일상의 루틴으로 돌아가기 위한 달리기였다. 짧은 달리기를 끝내고 샤워를 하는데 기분이 좋았다. 야외 달리기는 오늘 하루 나와 한 가장 큰(?) 약속이었다. 아침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으니, 남은 하루도 기분 좋게 나를 채우는 하루로 보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무너진 루틴을 일으키는 법 4
글쓰기
그리고 지금, 내 무너진 루틴을 일으키기 위해 브런치 글을 쓰고 있다. 무념무상 콘텐츠를 소비하기만 했던 뇌에서, 브런치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하고 생산하는 뇌로 전환시키고 있다. 사실 오늘 어떤 주제로 연재 글을 쓸지 굉장히 막막했었다. 명상하는 직장인의 이야기를 주제로 연재글을 쓰는 사람인데, 이번주 명상은커녕 OTT만 보고 있었으니 무슨 내용을 공유하고 쓸 수 있겠는가? 쓸 만한 내용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그냥 이번주 내가 보낸 시간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게 낫겠다 싶었다. 루틴이라는 게 무너질 수도 있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되는 거 아닌가? 사람이 언제나 항상 계획한 대로만 살 수 있을까. 이런 날이 있으면 저런 날도 있는 것이지. 무너졌으면 다시 세우면 된다. 나에게 관대함을 허락하니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렇게 지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번주, 루틴의 중요성을 느낀 한 주였다. 아침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하루가 결정되고, 그 하루들이 모여 일주일이 결정된다. 매일 내가 지키고 있는 명상과 일기, 독서의 루틴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 깨달았다. 다음 주는 이번주보다 조금 더 나를 채우고 성장하는 하루, 한 주를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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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이번주 나를 도파민에 쩔게 만들어 버린 예능이 뭐냐면, 웨이브 오리지널 프로그램인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다. (ㅋㅋㅋㅋㅋㅋㅋ)